태초에 싸움이 있었다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7)
 
조현설
미륵의 꽃 훔친 석가는 반칙왕? 
 
세상은 왜 이리 더럽고 치사한 곳이 되었을까?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한 고대인들이 생로병사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세상은 어째서 죄악이 넘실대는 소돔이 되었을까 물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 모든 것이 원죄의 결과라는 것이 종교의 대답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가 아닌 우리 신화는 뭐라고 했을까?
 
 무녀의 노래 ‘창세가’엔 미륵과 석가가
꽃피우기 내기를 벌이는데
석가는 미륵이 잠든 틈에 꽃을 ‘슬쩍’ 하고…
  
 
△꽃을 피워 우열을 다툰다는 무속의 관념이 불교의 미륵과 석가를 주인공으로 불러앉혀 ‘신들의 다툼’이란 신화를 낳았다. 태양신이 꽃을 피워올린 모습을 그린 ‘일월성신(日月星辰)’도의 한 부분
민속학자 손진태 선생이 1923년에 조사해 보고한 <창세가>라는 이름이 붙은 창조신화가 있다. ‘김쌍돌이’라는 함경도 무녀가 부른 노래를 채록해 놓은 것인데 그 안에 ‘더럽고 치사한 세상’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창세가>에는 ‘미륵님’이라는 창조신이 등장한다.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는 창조여신 마고할미와는 달리 선명한 형상과 이야기를 지닌 신이다. 마고할미만큼이나 몸집이 거대한 미륵님은 서로 붙어 있는 하늘과 땅 사이에 구리기둥을 세워 천지를 개벽한다. 일월성신을 만들고, 하늘에서 금벌레 은벌레를 금쟁반 은쟁반에 받아 남자와 여자를 마련한다. 이런 식으로 거인 창조신이 세계를 마련하는 신화는 적지 않다. 중국 문헌에 보이는 창조신 반고, 인도의 창조신 푸루샤의 경우도 유사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창세가>에는 미륵이 창조한 태평 세상에 느닷없이 ‘석가님’이 나타나서 미륵의 세상을 빼앗으려고 한다. “아직은 내 세월이지 네 세월이 아니다.” 미륵의 말에 석가가 응수한다. “네 세월은 다 갔다. 이제는 내 세월을 만들겠다.” 석가의 도전에 미륵은 어쩔 수 없이 내기를 제안한다. 내기 종목은 셋이다. 병을 매단 줄을 동해 바다에 드리워 누구 줄이 안 끊어지는가, 누가 여름에 강물을 얼어붙게 할 수 있는가, 누구 무릎에서 꽃이 피는가? 셋 다 미륵님의 장기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내기에서 누가 이겼을까? 당연히 석가다. 미륵이 이길 내기라면 애초에 석가가 나타나 시비를 걸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럼 왜 미륵님은 자신의 주 종목으로 내기에 나섰는데도 석가에게 졌을까? 여기가 정곡이다. 첫째 내기에서 석가의 줄이 끊어지고, 둘째 내기에서도 석가는 강물 얼리기에 실패한다. 계속 가면 셋째 내기에서도 질 판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싶은 욕심을 놓을 수 없었던 석가는 마침내 반칙을 범한다. 한 방에 누워 잠을 자면서 꽃 피우기를 하는 동안 미륵의 무릎에 핀 꽃을 꺾어 제 무릎에 꽂았던 것이다. 결판이 났다. 미륵님이 석가의 소행을 모를 리 없겠지만 내기는 내기. 신들이 다투는 창조의 공간에 호루라기를 부는 심판이 있을 리도 만무. 미륵님은 석가에게 세월을 넘겨주기로 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때 미륵님이 남긴 마지막 말이 압권이다. “더럽고 축축한 석가야. 네 세월이 되면 집집마다 기생 나고 과부 나고 역적 나고 백정 날 것이다. 말세가 된단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럽고 치사한 말세가 된 까닭이 여기서 비로소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창세가>는 <창세기>와 달리 두 신의 싸움에서 술수를 부린 석가가 이기면서 태평한 에덴이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에 신들의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악의 근원에 대한 우리 신화의 이해는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듯하지만 그 안에는 신화가 세계를 보는 내밀한 시선이 스며 있다. 더구나 대부분의 원시 신화들이 신들의 싸움 때문에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신화만의 수수께끼는 아닌 셈이다.  

미륵과 석가의 싸움을 해독하려면 먼저 미륵과 석가라는 이름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두 이름은 자꾸 우리를 불교로 유인하지만 이름은 다음 문제다. 이름을 괄호 치고 보면 떠오르는 것이 경쟁의 내용이다. 우리의 <창세가>는 삼세판을 통해 이야기의 긴장을 고조시키지만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싸움은 ‘꽃 피우기’다. 왜냐하면 이 신화는 몽골이나 중국 소수민족에게도 남아 있고, 일본 미야꼬 섬에도 전승되고 있는데 모두 ‘꽃 피우기’를 주 종목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왜 하필 꽃 피우기인가? 신화적 겨루기라면, 좀더 역동적인, 수로와 석탈해 식의 변신 대결도 있고, 주몽과 송양의 활쏘기 시합도 있지 않은가. 꽃 피우기는 아마도 미륵님의 창조신적 면모를 상징하는 행위일 것이다. 우리 무속신화의 주요한 공간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생명과 운명을 관장하는 꽃들이 만발한 저승의 ‘서천꽃밭’이다. 이처럼 무속신화에 자주 사용되는 꽃의 은유가 <창세가>에도 스며들어 대지가 꽃을 피우듯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신 미륵님을 그려낸 것이다. 수망굿의 넋 건지기 의례에서 사용하는 그 넋병을 달아맨 줄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능력이나 여름에 강물을 얼리는 능력 역시 생명과 자연을 조절하는 창조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보조장치다.  
 
석가의 ‘꼼수’ 이후로
세상은 더럽고 치사하게 됐다
석가를 왜 폄하하냐고?
무속에선 불교가 고까운게지!
 
 
그런데 평양 출신 정운학이 구연한 <삼태자풀이>를 보면 이런 창조적 능력을 지닌 미륵님이 대결에서 패한 후 승천하여 얼굴은 해와 달이 되고, 얼굴의 눈은 샛별이 되고, 코는 삼태성이 되고, 귀는 북두칠성이 되고, 배는 푸른 하늘이 되고, 몸은 대지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창조신의 몸이 우주와 대지의 구성물로 변형되는 것이다. <창세가>의 미륵과는 좀 다르지만 여기서 우리는 거대한 미륵님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아, 미륵님은 자연 자체였구나! 꽃 피우기란 자연 안에 이미 있는 능력이었구나!’ 
 
△ 창조여신의 원형을 간직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자리잡은 전남 영광군 도서면 남죽리의 마을미륵상. <한겨레> 자료사진
그렇다면 이런 미륵님을 쫓아내고 세상을 지배하겠다고 하는 석가님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자연에 적대적인 존재? 꽃을 피우듯 자연을 조절하는 능력은 없지만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은 있는 존재? 이런 존재는 인간이 이룩한 ‘문명’말고는 달리 없다. 석가님은 바로 문명을 상징하는 인격신의 형상인 것이다. 아주 단순한 논리인 듯하지만 우리 신화는 문명화된 세계야말로 ‘더럽고 축축한 세상’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창세가>는 적어도 고대 문명 이후에 마련된 신화일 수밖에 없다. 여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신화와는 상당한 상거가 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괄호 속에 넣어 둔 미륵과 석가라는 이름의 내력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 우리의 <창세가>가 굳이 불교의 보살과 부처를 받아들여 천지만물의 기원을 풀어놓은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짧은 문장 안에 간단히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미륵(maitreya)이나 그 어원으로 알려진 힌두교 미트라(mitra)가 우정이나 자애를 뜻한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힌두교의 미트라는 엄격한 바루나와 짝을 이루면서 자애로운 모성성을 상징하는 신이다. 이런 미트라에서 비롯된 미륵이 동아시아에 수용되면서 여성화되고 여신과 동일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륵이 자씨(慈氏)보살로 번역된 것이나 몽골의 창조여신 마이다르(미륵)가 좋은 사례다. 우리의 <창세가>가 미륵을 창조신으로 받아들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 미륵은 창조여신의 전통 위에서 수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힌두교나 불교의 신화 속에는 미륵과 석가의 원초적 투쟁담이 없다. 불경의 전생담에서 둘은 형제이거나 서로를 도와주는 공생관계로 나타날 뿐이다. 공생관계가 적대관계로 변형된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분명 어쩔 수 없이 불교를 포용했던 샤마니즘의 불교에 대한 적대감이 게재되어 있다. ‘말세’라는 미륵님의 예언 속에 담긴 뜻이 이런 것이 아닐까? 동시에 여기에는 남성들의 전쟁으로 점철된 고대 문명 세계에 대한 당대 무속의 진단도 들어 있다. 미륵이 다시 와야 태평세월이 될 세계. 이때 미륵은 불교적 이름을 지니기는 했지만 불교 이전의 신, 미트라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세상은 왜 더럽고 축축한가? 태초에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을 건 석가로 표상되는 문명화된 세계야말로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우리 신화는 말한다. 이는 자연을 속이면서 이룩한 문명을 자랑하는 우리의 통념에서 보면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 안에 그간 우리가 잊고 있던 신화적 진실의 한 자락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현설 기자는 중국 베이징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 교수를 했고, 돌아와서 티베트·몽골·만주·한국 신화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고려대·동국대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아시아 신화학의 구축을 공부의 한 목표로 삼고 있다.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는 우리 신화를 동아시아 신화의 시각에서 읽는 공부의 여적(餘滴)이다. 그 동안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 『문신의 역사』, 『고전문학과 여성주의적 시각』(공저), 『한국 서사문학과 불교적 시각』(공저),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역서) 등을 펴냈다.
 

기사입력: 2009/06/29 [10:40]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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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설 기자는 중국 베이징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 교수를 했고, 돌아와서 티베트·몽골·만주·한국 신화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고려대·동국대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아시아 신화학의 구축을 공부의 한 목표로 삼고 있다.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는 우리 신화를 동아시아 신화의 시각에서 읽는 공부의 여적(餘滴)이다. 그 동안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 『문신의 역사』, 『고전문학과 여성주의적 시각』(공저), 『한국 서사문학과 불교적 시각』(공저),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역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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