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10개나 하늘에 떠오른다. 이 해들은 부상(扶桑)이라는 뽕나무에 등불처럼 걸려 있다가 하나씩 차례로 떠올라야 하는 놈들인데, 무슨 심보인지 한꺼번에 솟아 인간의 대지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아들들의 장난에 놀란 것은 천제. 천제는 어쩔 수 없이 명사수 ‘예’를 보내 우주의 리듬을 헝클어 놓은 해를 쏘도록 명한다. 아홉이 떨어지고 하나만 남게 되자 자연의 질서는 회복된다.
〈산해경(山海經)〉이나 〈회남자(淮南子)〉 등에 보이는 영웅 예의 신화. 동이(東夷)라고 해서 더 호감을 주는 영웅. 신화에 관심 있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미국의 중국고대학자 세라 앨런은 이 신화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보여 준다. 그에 따르면 열 개의 해와 한 개의 해는 각각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의례를 반영한다. 상나라에 열 개의 해를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면, 주나라에는 오직 하나의 태양을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예의 태양 쏘기는 상나라에서 주나라로의 역사적 교체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허쩌족 명사수 메르겡의 영웅담은 일월 수 조정하는 창조신화 변형
그런데 왜 활쏘기냐고?
“부정한 힘에는 더 강한 힘으로”
샤머니즘의 주술적 믿음 깔려
하지만 달을 포함하여 일월의 수를 조정하는 신화는 고대 중국 문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주도의 대별왕·소별왕, 경기도의 선문이·후문이 형제, 몽골의 에르히 메르겡, 만주의 산인베즈, 허쩌(나나이)족의 메르겡, 먀오족의 창짜, 일본의 아만자쿠, 아이누의 아이누락쿠르 등등. 이들은 모두 너무 많이 떠올라 인간을 괴롭히는 해(또는 동시에 떠오른 해와 달)를 하나씩만 남기고 없애는 동아시아의 신화적 영웅들이다. 그렇다면 세라 앨런의 예 신화 해석은 이 유형의 신화가 지닌 더 보편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는 셈이다.
그럼 이 신화의 보편적인 뜻은 뭘까? 이 의문을 예 신화의 원형이라고 해도 좋을 허쩌족의 메르겡 이야기로부터 풀어 보자.
옛날에 하늘에 해 셋이 있었다. 해들은 마치 불항아리처럼 하늘 한가운데 걸려 백성들을 괴로움에 빠뜨렸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물가로 모이고 동굴로 숨어들었고, 낮에는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그때 흑룡강 하류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들 하나가 있었다. 나이 열여섯, 힘이 장사였다. 한 번 힘을 쓰면 산을 밀 수 있고 한 번 물을 마시면 큰 강물을 마르게 했으며 한 번 발을 디디면 깊은 연못이 생길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메르겡이라고 불렀다.
때가 이르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해를 쏘아 백성들을 고난에서 구하라고 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한 지 일 년, 99개의 활을 부러뜨리고, 9만9000대의 화살을 쏘았다. 화살에 맞아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해를 쏘러 가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허락을 얻은 메르겡은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장도에 오른다.
메르겡은 99개의 고산을 넘고 99개의 강을 건너고 99개의 협곡을 거쳐 마침내 동해에 이른다. 높은 산에 오른 메르겡은 마침 떠오르는 해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일시에 해 둘이 떨어졌다. 그러자 세번째 해가 놀라 구름 뒤에 숨었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널 쏘지는 않을 테니. 그러나 약속해라.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고. 낮에만 나오고 밤에는 쉰다고.” 메르겡의 명령에 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이 구전신화에는 예 신화가 지니지 못한 풍부한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예 신화 역시 문헌에 오르기 전에는 이런 식으로 구술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 해가 셋이라는 상황은 분명 자연재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지나치게 뜨거운 햇살로 인해 동굴이나 물가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여러 개의 해는 지독한 가뭄이나 폭염과 같은 자연의 이상징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해의 숫자가 둘이든 셋이든, 아홉이든 열이든.
사실 자연의 무질서를 다수의 일월로 표상하는 전통은 이미 창조신화에 보인다. 〈창세가〉(김쌍돌이 구연)를 보면 창조신 미륵이 둘씩 생겨난 해와 달을 하나씩 떼어 달로는 북두칠성·남두칠성을 만들고 해로는 큰 별과 작은 별들을 만든다. 이 창조신화에서 다수의 일월은 창조가 마무리되기 전의 우주적 혼돈을 상징하고 있다. 〈시루말〉(이종만 구연)이라는 무가를 보면 더 선명하다. 창조신인 당칠성의 아들, 선문이·후문이가 해와 달을 화살로 쏘아 해 하나는 천상에, 달 하나는 저승에 걸어둔다. 일월의 조정이 창조의 과정인 셈이다.
명사수에서 종교로 해결사 바뀐
재해가 무질서의 조절과정이라면
남아시아 대재앙 어찌 봐야 할지…
명사수 메르겡의 영웅담은 일월성신을 만들고 숫자를 조절하는 창조신화의 변형이다. 창조신의 아들로 창조과정에 동참하는 선문이·후문이와 같은 신이 메르겡이나 예의 모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변형의 숨은 뜻은 재해라는 자연의 특이현상이 신화의 논리에서는 일종의 재창조의 과정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빈번해지는 자연재해에 두려워하는 지구인에게 이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물음표 하나가 고개를 든다. 왜 활쏘기일까? 우선 가능한 설명은 활쏘기가 원시수렵민의 세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수렵민들에게 명사수는 최고의 능력자, 곧 영웅이다. 허쩌족이나 몽골족의 메르겡이라는 말이 명사수란 뜻이고, 고구려의 명사수가 주몽으로 불리고 그가 건국영웅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사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런 영웅이 문제해결자로 부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활로 해를 쏘아 떨어뜨린다는 상상이 가능했을까?
〈예기(禮記)〉를 보면 쑥대로 만든 화살을 사방으로 쏘고 나서 아이를 안고 조상들에게 아들의 탄생을 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중국의 민속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 의례에는 아들이 장차 다스릴 땅과 의사소통을 하게 함으로써 힘을 북돋워주려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사실은 부정한 힘을 화살로 쏘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주술적 믿음이다. 아마도 어떤 힘을 더 강한 힘으로 다스린다는 샤머니즘 특유의 논리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활을 쏘아 일월의 수를 조절한다는 신화적 상상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쯤에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 사건이다. 바로 경덕왕 19년(760년) 4월 초하루에 해 둘이 나란히 떠올라 열흘이 되도록 사라지지 않아 큰 소동이 벌어진 사건. 물론 이때의 두 해는 단순한 자연의 괴변이 아니라 경덕왕 시기의 불안한 정치적 현실을 상징한다. 귀족들에게 위협받고 있는 왕권이 두 개의 해로 표현된 것이다. 다수의 태양이 자연의 괴변이 아니라 왕권의 이상을 상징하는 쪽으로 변형된 셈이다. 예의 활쏘기에서 국가권력의 교체를 읽어냈던 세라 앨런의 시각은 이런 변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괴변의 해결자와 해결방식이다. 여기서는 명사수가 아니라 일관(日官)의 진언에 따라 승려가 호명된다. 처음에는 화랭이, 곧 무당이었다가 나중에 불교로 전향한 것으로 보이는 월명사(月明師)가 그 사람이다. 그가 저 유명한 향가 〈도솔가〉를 부르자 해의 괴변이 소멸된다. 영웅에서 승려로, 활쏘기에서 노래로 변모된 것이다. 이런 변모에는 다른 종류의 영웅에 대한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활을 쏘는 호전적인 영웅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진무하는 종교적 영웅에 대한 기대.
해의 괴변을 자연의 무질서와 조절과정으로 읽다보니 인류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남아시아의 대재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진으로 지축이 이동하고 섬이 떠내려가는 자연의 괴변이 여러 개의 해가 한꺼번에 출현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재난이 불러낸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 세계 종교계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묻기 전에 이런 자연재해가 재창조의 한 과정이라고 말하는 신화의 이야기에 한번쯤 귀를 기울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대재난에 맞설 또다른 메르겡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