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삶
[다락방기도] 마가복음 13:32-37
 
김영철

독일작가 미하일 엔데가 쓴 '모모'라는 제목의 어른을 위한 동화가 있는데요, 돈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비판한 작품입니다. 이 책의 얘기는 어른과 아이, 머리와 가슴, 빠름과 느림, 속도와 여유, 차가움과 따뜻함 등 두 개의 대조적인 이미지로 전개됩니다. 옛날의 원형극장 터가 남아 있는 마을에 낡아빠진 헐렁한 남자옷을 입은 맨발의 소녀 모모가 찾아들면서 얘기가 시작됩니다. 소녀 모모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은 시간이었고, 모모는 자기를 찾아오는 마을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데에 그 넉넉한 시간을 사용합니다.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여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줄 뿐 별말은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모모 앞에서 자기 얘기를 실컷 쏟아놓고 나면 스스로 해답을 찾고 웃는 얼굴로 돌아갑니다. 모모를 중심으로 따뜻한 사랑과 온기가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가던 어느 날 회색 신사들이 나타나 엉터리 계산을 들이대며 사람들에게 시간을 아낄 것을 요구합니다. "시간을 아끼면 곱절의 시간을 벌 수 있다!, 시간을 아끼면 미래가 보인다!, 시간은 돈과 같다. 그러니 시간을 절약하라!"고 설득합니다. 회색 신사들은 돈이 안 되는 얘기는 던져버리고 남들 따라 바쁘게 살아야한다며 사람들을 불안과 속도의 경쟁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별 쓸모없어 보이고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들을 줄이고 줄이며 쉴 새 없이 바빠지는데요, 그러는 사이 그들의 삶은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집니다.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사람들의 삶을 꽃피게 하고 삶에 온기를 더하는 작고 따뜻한 시간들이 점점 효율성과 경제성의 미명하에 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웃음이 없이 '빨리빨리!'라고 소리를 질러대던 마을사람들이 나중에 모모를 만나자 마음이 편안해졌고, 결국 모모는 회색신사들에게 빼앗긴 친구들의 시간을 찾아주는데 성공한다는 얘기입니다. 빼앗긴 시간을 찾은 마을사람들은 이제 어디서나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일하러 가는 때에도 창가에 놓인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거나 새에게 모이를 줄 시간이 있게 되었습니다. 소설 '모모'는 분주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헬라어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로 표현하는데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가 1초 1분 1시간 1주일 처럼 기계로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이고 객관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사람이 어떻게 관리하고 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단순히 시계에 나타나는 흘러가는 시간이요, 우연한 사건들이 지나가는 시간을 뜻하고, '카이로스'는 때가 꽉 찬 시간으로 구체적인 사건의 중요한 의미가 담긴 시간을 의미합니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흐름에 떠내려가듯이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고, '카이로스'는 의미를 발견하여 생동감 넘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에는 시간의 길고 짧은 개념만 있다면 카이로스는 선택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선택에 따라서 얼마든지 늘릴 수도 있고 얼마든지 의미있는 것으로 바꿀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9백세를 넘겨 살았던 므두셀라의 시간이 크로노스였다면 33년의 짧은 생애동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살았던 예수님의 시간은 카이로스였다고 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이 자명종 시계에 맞춰 허겁지겁 눈비비고 일어나 잠들 때까지 만들어놓은 시간표에 따라 시간의 노예처럼 시간에 끌려다니며 산다면, 그것은 크로노스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이로스는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느끼는 질적으로 풍성한 수확의 시간이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의미있는 순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24시간을 중요한 것을 먼저 관리하여 여유 있게 행동하면서도 보람 있는 성과를 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빨리빨리 바쁘게 더 많이 일을 하느라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합니다. 따라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승화시켜서 시간을 값있게 사용하게 되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자기 인생의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소설 '모모'에서도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시간을 볼 수 있는데요, 하나는 회색신사들이 가진 시간으로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소녀 '모모'의 시간으로 카이로스입니다. 모모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그들의 마음에 여유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갈등을 해결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한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양적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적 시간과 질적 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구분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양적 시간의 차원에서는 시간의 길이가 관심의 대상입니다만, 질적 시간의 차원에서는 기계적 흐름과 상관없이 어떤 조건의 성숙여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 양적인 시간을 말한다면,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질적인 시간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32절에 나오는 '그날과 그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재림의 때이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때로서 종말이면서 시작인 '카이로스'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완성되는 때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카이로스'의 때이므로, 그때가 임박했지만 '크로노스'적으로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는 지금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데요, 재림의 '그날과 그때'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 권한이 하나님께만 배타적으로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가 종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날과 그때'에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것이지만, 하나님이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믿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그날과 그때'를 준비하는 삶이고, 또한 믿는 자는 매 순간 모든 삶의 초점을 그날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이 땅의 삶이 부분적이고 한시적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고 계시니,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맛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이 담긴 마가복음 13장 앞부분에는 성전이 무너지고, 전쟁과 난리와 온갖 환난이 일어나고,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난다고 종말의 징조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리고 중간부분에는 '그때'에 우주가 해체되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고 했고 마침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종말에 재난이 일어나고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극에 달하고, 그 끝에 인자가 오시고 이 악한 세상이 마침내 끝날 것이라는 종말의 예고입니다. 초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들은 종말의 때에 모든 것을 걸어두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예수님의 재림이 동일시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예측할 수 있는 어떤 시점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 놀라운 일을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대했던 대로 자신들의 당대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 지연으로 초기신자들 중에는 재림신앙을 조롱하며 '자기의 정욕에 따라' 행하는 이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본문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그 문제를 분명하게 해명하고 있는데요,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의 종말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크로노스적인 차원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몇년 몇월 어느 시점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그런데도 카이로스적인 종말이 반드시 있으니까 깨어 있으면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32절에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는데요,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과 때를 사람들에게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아버지만 아시고 예수님 자신도 그날과 그때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자신의 능력을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제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 사실을 잘 설명했는데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때에 따라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때'에 대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이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했으니, 이때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때와 시기를 계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33절에서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했는데요, 주의하라는 말씀은 거짓선지자들로부터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본문에 네번 나오는데요,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아시대에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노아가 계속해서 경고했습니다만, 그 시대의 사람들이 깨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홍수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주의 재림이 확실히 있고 그 재림이 임박했으니 더이상 세상 정욕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육신적 병이나 사고도 깨어있지 못하고 방심할 때 일어나는데, 우리의 영혼도 깨어있어야 탐욕이나 교만같은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에 관한 비유가 있지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을 수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깨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밤중에 온 신랑을 맞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매일 종말의 날로 여기며 하나님이 주신 이 현재시간과 맡기신 소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이 이 땅에서 사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거룩하게 살며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며 오늘을 성실히 살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님은 종들의 비유를 들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운 줄 알면,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외국으로 나가면서 종들과 문지기에게 집을 지킬 권한과 책임을 맡겼습니다. 여행을 떠난 집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고 종들에게 깨어있는 자세를 명령한 것입니다. 홀연히 돌아온 집 주인은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문지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할 것이고 주인이 온 줄도 모르고 문지기가 잠자고 있으면 집 주인은 그 문지기를 악한 종이라고 책망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상의 종말에 관한 말씀은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이고, 본문은 임박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맞이할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자세를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과거에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는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중간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개념과 미래적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지금 하나님나라에 거하고 있지만 아직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하나님나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하나님나라도 포함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내세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고 또 현세에서 하나님나라를 누릴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남아연방의 넬슨 만델라는 44세에 감옥에 들어가 71세가 되도록 27년간 감옥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자기를 찾아오는 변호사를 볼 때마다 "여기는 지옥이야! 여기는 지옥이야"라며 발악을 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그래서 그의 마음이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감옥에 있어도 건강하니 감사하고, 보잘 것 없는 빵이지만 매끼마다 먹을 수 있으니 감사하고, 캄캄한 감옥에 있지만 작은 창으로 하늘을 볼 수 있으니 감사하고, 강제 노동 현장에 가서 푸른 농작물을 볼 수 있으니 감사했습니다. 그후 그를 찾아온 변호사는 그의 얼굴이 달라진 것을 보고 "뭐가 바뀌었나요?"하고 물었는데, 만델라는 "아니오, 환경은 바뀐 것이 없지만 내 마음이 바뀌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만델라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자기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니까 지옥과 같던 감옥이 천국이 되었고, 세상도 다 좋아보이고 감사가 넘친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했는데요, 성령을 힘입으면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여전히 악한 세대 안에 붙잡혀 있지만, 날마다 성령충만한 상태로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이라고 했는데요, 물질이 많고 육신이 편하다고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현재적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이 땅에서도 카이로스적인 시간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맛보며 사는 사람도 죽는 날까지 육신을 지니고 살아갑니다만 성령 안에서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지만 성령충만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우리가 죄를 없애지 못해도 성령을 힘입어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 안에서 마귀가 다스리는 곳은 마귀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 축복하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악한 세대를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종말의 징조들을 보면서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오늘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재림과 우리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식하면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그날과 그때를 준비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옵소서. 이 죄악의 세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종말이 임박했음을 깨닫게 도와주시고 회개하며 주님의 경고를 듣고 구원의 방주로 들어오도록 은총내려 주시옵소서.

김영철 님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상사 미국 주재원 생활을 거쳐, 미국 뉴저지 드루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교회와 한인교회에서 8년간 목회를 하고, 현재는 Spirit Filled Church 담임목사를 맡고 있습니다. youngckim48@gmail.com
 

기사입력: 2015/03/25 [21:20]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선거 동안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의 글을 게시하고자 할 경우에는 '실명인증' 후 게시물을 등록하셔야 합니다. 실명확인이 되지 않은 선거관련 지지 혹은 반대 게시물은 선관위의 요청 또는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본 실명확인 서비스는 선거운동기간(2017.04.17~2017.05.08)에만 제공됩니다.
일반 의견은 실명 인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주간베스트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