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죽음과 부활신앙
[다락방 기도] 고린도전서 15:12-19
 
김영철

얼마 전, 신문에는 한국에서 자원외교 비리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가 북한산 입구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던 경남기업 회장의 얘기로 덮여있었습니다. 고인은 자수성가해서 일어섰다는데요, 70년 초반에 화물운송 영업소를 운영했고, 2년 뒤에 벌어놓은 돈을 모아 조그만 토건회사를 인수했다고 합니다. 건설업으로 성공하자 정치계에도 뛰어들었고 대선과정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위해 힘을 다해 도왔다고 죽기 전에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변호인은 자원외교와 관련된 회사가 수십 개인데 경남기업이 가장 먼저 수사를 받게 된 것에 대해서 고인이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인은 "경남기업에서 자원외교와 관련해서 1300억 정도를 투자를 했고 국가에서 융자받은 금액은 400억 정도인데, 추진하는 과정에서 경남기업은 오히려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원외교에서 융자받은 돈은 본인이 단 1원도 개인적으로 착복한 바가 없다는 말을 몇 차례 반복했다고 합니다. 고인의 유서에도 "혐의가 없고 결백한 만큼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며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곁에 묻어달라"고 자필로 써 있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과 대기업의 소유자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며 생존해나가는 부패와 비리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삼성과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대기업들은 사업경영을 잘해서 성장한 것이라기보다 정권 실세들에게 비자금을 듬뿍 주며 권력으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정부는 돈을 갖다 바친 기업들에게 그 대가로 부자감세나 법인세감면, 융자나 규제완화 같은 특혜로 큰돈을 벌게 해주는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그 비리가 드러나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면, 경남기업 회장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권력자도 기업주도 영광을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전투구하는 실상을 들여다보면 불쌍한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쟁과 욕망의 끝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 온갖 종류의 불쌍한 병자들이 누워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는데요, 양을 매매하는 양의 문 옆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가에는 온갖 종류의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따금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게 할 때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면 어떤 병도 낫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병자들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려고 달려가는 사람을 밀어서 넘어뜨리고, 앞서가는 사람을 잡아당기며 아수라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남이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체념한 상태로 38년 동안 누워 있었던 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병자는 오랜 세월동안 누워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쌍한 그를 보시고 다가가셔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먼저 물으셨고 그 병자는 누구 하나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옆에서 손을 잡아주며 자기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른 병자와 경쟁할 수 없는 그 약자를 불쌍히 보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며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연못이라고 불리었지만 1등만 살아남는 살벌한 곳이었고, 거기에 모인 병자들은 이 땅에서 생존경쟁을 하며 힘들게 사는 불쌍한 인간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동식물들이 가지지 못 한 여러 기능들을 가지고 만물을 정복하고 사용하며 지배하는 영장으로 살아갑니다. 식물을 재배하고 육축을 길러 삶에 유용하게 사용하며 두뇌의 기능을 통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로 문화와 문명을 발달시키며 진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처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냉철하게 평가해 본다면 인간처럼 불쌍한 존재가 없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겨운 사람들도 많고, 장애를 가졌거나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고,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자살을 생각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청년들은 실업자로, 장년들은 삶의 무거운 짐으로, 노인들은 고독으로 고달픈 삶을 견디고 있습니다. 또 생존을 위해서 경쟁을 해야 하는데 능력이 없어 자포자기하는 경우도 있고, 양심에 비추어보면 정의가 아닌 줄 알지만 비굴한 행동을 하거나 타협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다는 것 자체가 경쟁의 연속이고 생존을 위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홉스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지만 자연 상태에 있어서는 만인은 만인에 대해서 싸우는 상태에 있다"고 했습니다. 싸우면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으니, 들여다보면 모두가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도무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죽음을 향해 행진하고 있으니,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인생의 비극은 인간이 죽는다는데 있다기보다 육체가 죽은 후에 다시 사는 부활신앙이 없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해 불쌍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고 있더라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마치 내일 도축장에 끌려갈 돼지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지 않고 희희낙락하며 먹고 즐기기에 바쁜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

본문 마지막 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을 즐기지도 못하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나라에서 살기 위해 고난을 인내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고, 이 세상의 삶 너머 저 천국의 삶을 바라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삶만을 볼 때 불쌍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놓일지라도 그 어려운 상황 너머를 볼 수 있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을 병자로 살았던 일본의 여성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건강했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던 하나님 은혜를 병상의 자리에서 누릴 수 있었다고 고백했지요? 스스로 불쌍하게 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그녀는 부활신앙으로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의 삶 너머를 볼 수 없기에 이 세상 사람들처럼 불쌍한 존재로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매일 내 시간의 가장 귀중한 부분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과의 사귐에 사용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부활이 없으면 잃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죄로 인해 땅에 가시와 엉겅퀴를 내며 살아야 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면 절망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상의 삶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허무감과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영생의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 사도바울 당시의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육체는 죽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함께 인간의 육체는 땅속에서 썩어 없어지고, 영혼은 분리되어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보았습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와 영지주의 사상이 강한 이방도시였고 요즈음의 대도시들처럼 음란과 향락과 죄악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과 육신을 철저히 분리시켰고 영은 깨끗하나 육은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으로 부활하실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은 악한 물질세계를 벗어나서 천상의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믿었기에 육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없어지기 전에 육체를 만끽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육체의 죽음 후에 부활이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죽은 자들이 어찌 다시 살 수 있는가하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면서 속으로는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난다고 믿고 죽기 전에 즐기겠다고 허랑방탕하게 살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죽음후의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삶의 태도에 물질주의와 육체주의, 그리고 허무주의의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곡식을 곳간에 잔뜩 쌓아두고, 인생의 즐거움을 노래합니다만 잠깐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책망하셨고 그날 밤에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죽기 전에 육체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며 부활의 생명에 대해 논증한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앞부분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 여러 증인들을 열거했습니다. 베드로와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을 보이셨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잠들었지만 대다수는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이셨고 맨 나중에 죄인의 괴수였던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삶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고, 사도바울도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나라에 눈을 뜨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아무 가치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자랑스럽게 여기던 세상적인 소유를 다 버렸습니다. 부활신앙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변화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삶의 태도와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아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믿는 것이므로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은 일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넓고 편한 길을 택할 때, 믿음의 사람은 좁고 험한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위해 살기를 포기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찾고 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하나님나라와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온갖 고난과 박해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자료를 살펴보면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제자들이 순교했는데요, 그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육체의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안타까워 합니다. 부활의 진리를 그들에게 전파했는데도 부활을 부인하고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서 그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사도바울이 책망한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는 주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복음도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고 한다면 쉬지않고 기도하며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가는 것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활이 없고 죽음이 끝이라면, 부활신앙으로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정욕을 다 내려놓고 이웃을 사랑하며 남을 섬기며 절제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불쌍한 자들일 뿐입니다. 본문 17절에서 사도바울은 죽음이 끝이라면 다시 믿음도 헛되고 사람은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했습니다. 죄 때문에 죽게 된 사람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생명을 주시는 것이 복음인데 죽음 후의 영생이 없다면 신앙도 다 헛되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절망적으로 살아야 하는 비참한 존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죽음 후에 더 이상 생명이 없다면, 현재의 삶도 의미가 없어 허무와 고독을 느낄 것이고, 사랑도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

요즘 '힐링'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요, 우리사회가 그만큼 상처가 많고, 피곤에 지쳐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연과 이웃들과 평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세상에서 생존경쟁을 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삶의 기쁨보다 슬픔이 많아집니다. 잘못된 제도와 가치관에 억압당하며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본질적인 모습을 잃어버리고 비천한 존재로 떨어지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눈을 뜨고, 그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바랄 것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있기에 새상의 고난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고 말씀했지요? 부활신앙에서 오는 기쁨은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얻는 기쁨이나 육신적인 안락에서 얻는 기쁨이나 성공하고 번영하여 얻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하나님나라에서 살아가는 기쁨이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 축복하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의 생명력을 얻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 죄악이 많은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음을 향하여 행진하던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슬픔 가운데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이 땅에서 탐욕에 사로잡힌 권력자들과 기업주들을 불쌍히 보시고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돌아와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은총내려 주시옵소서.

김영철 님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상사 미국 주재원 생활을 거쳐, 미국 뉴저지 드루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교회와 한인교회에서 8년간 목회를 하고, 현재는 Spirit Filled Church 담임목사를 맡고 있습니다. youngckim48@gmail.com
 

기사입력: 2015/04/17 [00:46]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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