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반의 붕괴와 부활의 생명
[다락방 기도] 사도행전 17:22-31
 
김영철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폴 틸릭은 독일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했었는데, 나치가 반체제행위 혐의로 그의 교수직을 박탈해버렸습니다. 그후 미국으로 건너와서 강의를 하면서 책들을 썼는데요, 그중에 그가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서 행한 설교를 묶은 '기반의 붕괴'(the shaking of the foundation)라는 설교집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가 제1,2차 세계대전을 목격하며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끼고 구약 예언서에 나오는 말씀으로 설교한 것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4장에,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라는 선지자의 예언이 있습니다. 또 이사야 54장에는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는 예언도 있습니다. 틸릭은 선지자들의 예언들이 결코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고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위기를 경험했던 그가 앞으로 닥칠 인류의 위기를 내다보며 경고한 것입니다. 그가 보는 위기는 단순한 한 나라의 패망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온 세상과 인류의 위기입니다. 삶의 기반이 붕괴되는 그런 위기를 바라볼 때 우리는 종말을 보는 듯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데,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설교하면서 그는 이런 얘기도 썼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의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두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데, 다가오는 질서는 현재의 질서를 흔들면서 그것과 싸우면서 그리고 그것을 정복하면서 다가온다. 성경은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으시던 때와 그 기초의 흔들림과 세상의 붕괴에 관해서 말씀한다. 땅은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흔들렸듯이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다시 흔들렸다. 태양은 그리스도가 눈을 감으셨을 때 빛을 잃었듯이 그분이 무덤에서 일어나셨을 때 다시 떠올랐다. 불멸하는 영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다." 그는 현재적인 삶의 기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붕괴되고 새로운 생명이 부활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위기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우상의 도시였던 그리스의 아덴에서 참된 신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전도하면서 온 천하의 인류에 대한 최후의 심판과 새로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본문의 설교를 하게된 배경을 살펴보면,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 3차에 걸쳐서 전도여행을 하며 그의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일인데요, 1차 때는 주로 소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했고, 2차 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활동범위를 유럽으로 넓혔습니다.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 아덴으로 갔습니다. 본문의 설교가 행해진 곳은 옛날 헬라제국의 중심도시이며 철학의 도시였던 아덴이었고, 아덴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고대의 3대도시로 꼽혔습니다. 로마제국의 문화적 중심지였고, 철학과 학문, 예술과 건축 등 모든 분야에서 활발하게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문화도 여기에서 나왔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대가들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전도하러 간 바울사도가 아덴을 둘러보다가 그 도시가 온갖 우상들로 가득찬 도시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덴은 지금으로 말하면 그리스 아테네인데요, 그 당시 아덴은 신의 도시라고 할만큼 거대한 신전과 여러 신상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도시국가였습니다. 신들의 우두머리는 제우스이고, 그의 아내이며 누이이면서 여신의 우두머리는 헤라였습니다. 그 외에도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 곡물의 성장을 주관하는 여신 데메테르, 화로의 불을 주관하는 헤스티아 등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각각 그들을 섬기는 단들이 아덴의 거리에 놓여 있었고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단도 있었다고 본문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바울이 아레오바고에 가운데 서서 설교했는데요, 아레오바고는 로마의 군신인 아레스 신의 언덕이라는 뜻이고, 도시의 중심이었던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의 석회암 언덕이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바위로만 이루어진 불모의 언덕이었지만 한때는 고대 그리스의 원시의회와 법원 등이 들어서 있던 귀족세력의 본산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아테네의 공회가 모이는 장소였는데, 사상이나 철학을 논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었던 모양입니다. 거기서 공회가 소집되었을 뿐만아니라 철학자들이 모여 논쟁도 했고, 재판관들이 재판도 진행했고, 교사 후보자들을 심사하여 임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덴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이 높은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바울은 천지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제로 설교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사도바울이 아고라인 시장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아덴의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 중의 하나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랬는데 아덴의 철학자들이 차츰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고 마침내 아덴의 사람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불러서 그의 얘기를 듣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본격적으로 논쟁하기 위해서 그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끌고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대상은 대부분이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 같이 인생은 결국 소멸되고 만다는 유물론자들과,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 같이 범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철학자들에게 사도바울은 그들이 지금까지 듣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죽은 자의 부활과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던 것입니다.

본문 22절의 후반부에 보면, 바울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고 아덴 사람들의 종교심을 거론하면서 변증을 시작합니다. 이 '종교심'이란 영원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하겠는데요, 전도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신을 향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이 종교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금, 은, 돌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섬겼는데,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겼다고 했습니다. 인류는 그런 기술과 예술과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살아왔고,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을 거기에 쏟는다면 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숭상하는 신은 과학과 기술이고, 사람들이 따르는 종교와 사상에도 신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그런 사상으로 우리의 정치와 사회, 교육과 예술, 심지어 종교까지 지배해 가고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겼듯이 현대인들도 인간의 기술과 고안, 그리고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마음 한 구석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사람들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술과 고안과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력과 기술력을 상징하는 고층 빌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고, 이런 것들을 신처럼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 신전과 다를 바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면서, 결국은 허무와 죽음에 이르게 할 물질주의나 성공주의나 육체주의는 우리의 거짓된 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인류에게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제한하시면서 더듬어 하나님을 찾으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인류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 어두움에 빠진 인생들은 자신들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마음속의 종교심으로부터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숭배합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 그리고 바로 알아야 할 천지의 주재자가 누구인지 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그분은 만물 가운데 계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신다고 설명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손으로 만든 각종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 진짜 신은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인간이 만든 어떤 건물이나, 의식에 따라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30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으니"라고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며 이제는 회개하고 참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천당과 지옥을 외치면서 믿으면 복 받고 번영을 누린다는 식으로 설교할 수 있지만, 지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게 논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그리스 철학으로 무장된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의 논리를 이겨야 하는 부담이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 31절은 바울 설교의 결론이고, 동시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말씀했는데요, 여기서 심판은 생명이냐 죽음이냐,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술과 고안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심판할 날을 결정했다는 것이고, 생명의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은 생명이며 구원이고, 하나님이 흔들리는 기반을 무너뜨리시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세우시는 것이므로 심판의 날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기준은 공의 즉 하나님이 보시는 정의이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미 증거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인간의 정의와 법을 기준으로 불의하게 죽였습니다만,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공의를 보이시며 새 생명을 주는 심판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지 않는 것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신으로 만들었던 우상과 그들이 자랑했던 기술과 고안은 구원의 능력이 없고, 오늘날의 과학과 물질만능주의도 그 결과는 심판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9장에도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는데요,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이 정해진 것처럼, 심판도 정해져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부활을 통해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3장에는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베드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에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을 받기 위해 부활하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고, 현세의 삶은 둘중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주만물가운데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 앞에서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생명의 부활을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의롭게 보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불의와 부조리 가운데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 날이 위로와 소망이 될 것입니다. 마치 신부가 설레임과 기대 속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 날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그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이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에 부활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고,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 권력과 정치권력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사탄의 기반이 무너졌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우상과 불의와 권위주의가 심판받음으로 하나님이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힘과 권력이 사이비이고, 오직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 부활의 소망으로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위해서 보이는 물질세계를 극복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죽어 흙으로 돌아고 마침내는 썩어서 없어지지만, 주님의 재림 때에는 최후의 심판을 위해 죽었던 모든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 열매를 맺듯이 겨울에 죽은 것 같았던 나무나 풀이 봄에 다시 새롭게 돋아나듯이 우리는 죽은 후에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과 누가복음 24장을 읽어보면,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의 몸과 같은 몸은 아니지만, 우리는 심판의 날에 영만이 아니라 살과 뼈도 있는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영혼불멸설 같은 헬레니즘식 사고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령한 몸을 입고 인격적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대할 때마다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의 슬픔을 경험합니다만, 장차 부활한 이후에 하나님나라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보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운명하기 이전의 모습 그대로 부활하셨고 바로 그 몸으로 제자들과 이야기도 하시고 음식도 잡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져보며 확인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비스럽게도 잠긴 문을 통과하셨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봅니다만, 심판의 날에는 부활의 모습을 완전하고 분명하게 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 축복하셔서 부활의 그날을 믿고 소망하면서 날마다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저희들 이 땅에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만,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세상의 우상들을 물리치며 선한 일을 행함으로 부활의 생명을 위해 살아가도록 은총내려 주시옵소서. 이 타락한 세상에서 권력과 부를 추구하며 세상의 환락에 빠져 심판으로 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김영철 님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상사 미국 주재원 생활을 거쳐, 미국 뉴저지 드루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교회와 한인교회에서 8년간 목회를 하고, 현재는 Spirit Filled Church 담임목사를 맡고 있습니다. youngckim48@gmail.com
 

기사입력: 2015/04/22 [15:06]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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