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생명으로 가는 과정
[다락방 기도] 누가복음 8:49-56
 
김영철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큰 관심사중 하나는 건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건강을 위협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들 두려워하며 불안해 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중동에서 온 메르스라는 전염병 때문에 공공장소나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뜨이고, 온나라가 홍역을 앓고 있는듯한 모습입니다. 한국의 신문도 TV도 며칠동안 계속해서 메르스에 관한 보도에 집중하고 있고 대통령도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달에 메르스 환자가 처음으로 발생한 이후 어제 현재로 5명이 사망했고, 양성으로 확진된 사람이 60명이 넘었고, 격리대상자가 2천명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병원들도 방문자들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관광이나 수학여행도 취소되고 있고, 공연이나 행사도 연기되고 있고 휴업하는 학교도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커피점이나 가게를 찾는 손님들도 많이 줄어들고 있고, 국가 전체적으로 내수나 경기가 침체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전망도 있습니다. 정부의 관련기관과 의학 전문가들은 메르스에 감염되어도, 평소에 건강하고 면역력이 있는 사람은 가벼운 감기 증세 정도로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의사들은 메르스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데도, 메르스는 치료약이 없고, 치사율이 비교적 높아서 일반 국민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전염병 그 자체보다는 전염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불신의 분위기로 인한 병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정보를 투명하게 국민들에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는 보건복지부와 정부의 권위적인 자세와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불안과 공포를 키우고 있는듯이 보입니다.

죽음의 공포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시로가 중병에 걸리자,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이 급히 오셔서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애기가 나옵니다. 누이들은 오빠가 곧 죽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있는데도 예수님이 빨리 오시지 않으니까 발을 동동 굴리며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느긋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누이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줄 아셨을 것입니다만, "그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며 서두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병에 걸리거나 죽음의 위협이 있을 때, 걱정하고 불안해 하고 슬퍼합니다만, 하나님의 높은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베다니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 있었고 누이 마르다는 예수님께 일찍 오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오빠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시며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가 누워있던 무덤으로 가셨고,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사로는 죽음의 잠에서 깨어 수족을 동인채로 밝은 빛 아래로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여기서 잠시 살다가 결국에는 병들고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죽은 사람을 보고 슬퍼하거나 우는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시간차가 있을 뿐,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다 가야 하니까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오히려 불쌍해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깨어나는 것이고, 죽음은 생명으로 가는 과정으로 보시며. 죽음을 잠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죽음을 잠으로 이해한다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그렇게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높은 지위를 갖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야이로라고 하는 유대의 회당장이 혼자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집에 와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 집에 사랑하는 어린 딸이 죽어가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고, 그 불행한 사건이 신분이 높은 회당장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예수님을 찾게 했습니다. 그의 간청을 듣고 그의 딸을 고치기 위해서 가던 도중에 주님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여인이 고침을 받는 동안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딸이 곧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본문 49절을 보면, 그러던 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소식을 가지고 왔는데요, 회당장의 외동딸이 결국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슬픈 소식을 전한 사람은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덧붙였는데요, 예수님이 오셔도 이제 할 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아직 살아 있을 때 약을 쓰며 의사가 필요하지만, 숨이 끊어지면 손을 놓아야 하고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합입니다. 본문 50절에 보면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한계 너머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 있다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도 덧붙였습니다. 아마도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 딸을 살리시겠다는 뜻인줄 모르는 채로 야이로는 예수님을 자기집으로 모시고 갑니다.

예수님 일행이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장례의 절차는 시작되었고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그 마을의 곡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고, 이제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도착했으니 시신을 가족무덤으로 옮겨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분명히 이 소녀는 죽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울고불고 슬퍼했는데,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시며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했습니다. '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살려내실 것이라는 뜻이 있어서 다시 깰 것이니 잔다고 하셨고, 예수님께는 사람이 죽은 것은 자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 있어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깨워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사람의 죽음이 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어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잠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믿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할 때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선 깨어날 수 없는 죽음이 없으므로, 예수님이 '잠'이라고 표현한 의미는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자는 삶과 죽음의 문제라기보다 언제 깨어 있느냐하는 문제이고, 육신의 한계 안에서 깨어 있으면 이곳의 삶이고 육신의 한계를 넘어 깨어 있으면 저곳의 삶입니다. 불신자에게는 죽음이 끝이지만 신자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깨어나기 위해 잠자는 것이요, 이 땅의 삶은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우주만물과 모든 생명체의 존재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창조임을 명시하는 성경은 죽음이란 창조주의 뜻을 거역한 인간행위 곧 죄의 결과임을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생명이 유지되도록 설정해 두신 조건을 피조물인 인간이 파기한 데서 생겨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현상이 아니라, 생명유지를 위한 조건의 파괴로 생명현상이 중단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죽음은 영원한 파멸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한시적으로 처해 있는 무의식 상태이고, 성경은 이 상태를 '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잠'은 죽은 자의 상태를 가장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은 열왕기상과 역대하의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의 왕들이 사망했을 때 그들이 조상들과 함께 자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신약도 본문의 야이로의 죽은 딸 뿐만아니라 죽은 나사로에게도 예수님이 잔다고 말씀했고, 바울과 베드로도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죽음을 '영원한 잠'에 비유하는데요, 그것은 단지 문학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다시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영원한 잠'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형태를 달리하는 지속이고, 죽은 자는 잠의 형태로 생명을 지속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깨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며 인생을 아름답게 살다간 이들에게 죽음은 축복을 약속하는 잠일 것이고, 죄와 더불어 헛되게 인생을 산 이들에게 심판이 기다리는 저주의 잠일 것입니다.

본문 5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아이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며 아이를 일으켜 세우신 후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살리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육적으로는 빵을 먹어야 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56절에서는 예수님이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이 소녀를 살려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얘기가 마태복음 8장에도 나오는데요, 거기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한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으니,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제사장에게 가서 알리고 확인 받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은 알리지 말라는 뜻인데요, 예수님은 기적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대신에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만 믿게 될 위험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는데,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잘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셨다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마귀의 시험을 받는 자리에서 이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돌로 떡덩이를 만드는 그런 이적들을 얼마든지 행하실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시며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 보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황당한 질문을 했습니다. 칠형제가 살았는데, 맏형이 자식이 없이 죽은 후에 나머지 여섯형제가 차례차레로 형의 아내를 취했다가 모두 자녀가 없이 죽었다면, 부활 때에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물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하늘나라에는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하늘나라에 가서 살 때에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삶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영원히 살게 된다고 설명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현재와 같은 시간개념이 끝나고, 현세적인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다른 시간에 죽지만 이 세상의 시간이 하나님께는 영원한 한 순간이기 때문에 영원한 한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 셋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다가 그 몸이 변화되셨고, 제자들은 신비한 몸으로 변화된 예수님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그때 변화하신 예수님이 수천년 전의 모세와 수백년전의 엘리야와 순간적으로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본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을테니 거기서 살자고 좋아했습니다. 이 얘기는 더이상 현세적인 시간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존재하지 아니함과 우리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 시간이 끝나버림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하나님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건지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믿는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게 하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랑하며 거룩한 삶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은혜의 시대가 지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의인들은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리고 악인들은 죽음의 형벌을 당할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아무 의식도 없이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으면 잠자는 것처럼 그대로 죽어 있다가 세상역사의 끝에 부활하여, 생전에 행한 바를 따라서 영생을 얻거나 영멸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재산이나 그 무엇도 가지고 갈 수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때에 우리의 뒤에 따라오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성령의 인도로 맺은 삶의 열매들입니다. 우리는 현세에서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과 만나고 있고, 예배 중에도 이웃과 서로 나누는 사랑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통해서 잠들었다가 깨어나면서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영원히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하나님을 보고 알지마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하나님과 만나게 될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인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게 될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과 궁극적으로 영원히 만나게 되는 그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그 크신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 축복하셔서 육신의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대면하는 그날을 바라보며 그날을 준비하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믿지 못해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살아가는 이 때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희망과 용기의 말씀을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삶의 관심을 헛된 세상의 육적인 안락에 기울이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 땅에서 자연의 재앙과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 빠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도록 은총 내려 주시옵소서.

김영철 님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상사 미국 주재원 생활을 거쳐, 미국 뉴저지 드루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교회와 한인교회에서 8년간 목회를 하고, 현재는 Spirit Filled Church 담임목사를 맡고 있습니다. youngckim48@gmail.com
 

기사입력: 2015/06/22 [12:06]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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