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일 초대장
 
박일환

부천에 있는 벗들과 한 달에 두 번쯤 만나는 모임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문학회 활동을 하던 벗들이 모여 작품 합평을 하고 있는데, 합평을 빙자해서 얼굴 보고 술 한잔 나누는 재미가 더 크기도 한, 다소 느슨한 모임입니다. 워낙 오랜 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들인지라 마치 한 식구처럼 허물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얼마 전 제 앞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이 제 생일인데 우리 집에 술과 안주를 준비하겠습니다.
문학모임 겸 허리끈 풀고 술 한잔씩 하러 오세요.
선물은 마음의 선물이 최고로 귀한 선물이기는 하나 저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그 귀한 선물을 덥석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해서 제가 가벼운 선물목록을 준비했습니다.
각자 해당되는 선물을 꼬옥 들고 오시기 바랍니다.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시는 분은 미리 연락 주세요.


목록

1.조건들-새물결
2.조선 유학의 거장들-문학동네
3.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서커스
4.불완전성:쿠르트괴델의 증명과 역설-승산
5.로아나여왕의 신비한 불꽃(상)-열린책들
6.로아나여왕의 신비한 불꽃(하)-열린책들
7.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길
8.언어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길

모임 성원 중의 한 명이 자신의 생일잔치에 초대하는 내용인데, 참 독특하지요? 평소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책값이 만만치 않은 탓에 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선뜻 구입하지 못하다가 자신의 생일날 한몫(?) 잡겠다는 생각이 갸륵하기만 합니다.

출판사 이름 옆에는 친절하게도 그 책을 사 올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 부분은 제가 지웠어요. 무슨 기준으로 책을 배당했을까를 짐작해 보니, 책 가격과 그 사람의 경제력을 연결시킨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그날의 생일잔치에 가지 못했어요. 마침 다른 긴요한 일이 생겨서 갈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배당된 책을 사 주지 못했지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 엊그제 서점에 가서 저에게 배당된 책을 사왔어요. 다음 모임 때 가져다 주려고요. 마음의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이니, 늦었다고 타박하지는 않겠지요?

박일환 기자는 시인으로 한국작가회의 회원.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푸른 삼각뿔』『끊어진 현』이 있다. 1992년 제4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기사입력: 2008/12/03 [21:55]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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