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는 나무 그늘도 귀하다
<몽골 여행기 2> 바람결 따라 달린 초원길 2,000Km
 
최성수
  
▲ 풀을 뜯는 말조차 활기가 넘친다. 초원은 살아있는 생명의 땅이다.     © 최성수
 
   어워에 안녕을 빌고
 
벅드산을 지나자 이제는 온통 초원이다. 포장길이긴 하지만 초원 사이로 뻗어있어서인지, 도로조차 푸른색으로 보인다. 자동차 길을 따라 옆으로 기찻길이 놓여있다. 몽골은 철도가 발달한 나라가 아니다. 물동량이 많지도 않고, 인구조차 몇 안 되는데 대량 수송 수단인 철도를 건설할 까닭이 없는 탓이리라. 큰 철도라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국제 철도와 이쪽 서북 지역의 에르데네트까지 이어진 철길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우리와 함께 나란히 달리는 저 철길이 바로 에르데네트 행 기차가 달리는 길이다. 그런데 철길을 목책으로 막아 놓았다. 목책은 보통 지켜야 할 것을 둘러싸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저 목책이 지키는 것은 철길인 셈인데, 대체 철길을 누가 떠메고 가기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도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초원에 말이다. 알고 보니 양들이 철길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목책이란다. 
알래스카 북부에서 앵커리지로 이어지는 철길을 달리는 기차는 순록의 이동 철이면 한없이 느려진다고 한다. 순록들이 주로 눈이 덜 쌓인 철길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기차는 천천히 순록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란다. 끝없이 하얀 눈밭에 점점이 이어진 순록떼들과, 그 뒤를 마치 어미 양인 양 느릿느릿 뒤따르는 기차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상상만으로 행복해 했던 적이 있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철길과 철길을 호위하듯 늘어선 목책들을 보며 나는 달리는 보이지 않는 양떼들을 떠올리고 또 행복해진다. 행복이란 어떤 사물을 통해 상상하는 또 다른 사물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는 사이 길은 초원 너머로 사라진다. 사라지는 그 길을 향해 내가 탄 차는 마치 숨어들듯 달려간다.
 
얼마를 달렸을까, 길 가에 까만 새가 앉아 있다가 푸드득 날아간다. 커다란 것이 독수리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까마귀다. 몽골의 까마귀는 독수리만큼이나 크구나 하며 감탄을 하는 사이, 차가 밀린다. 이렇게 한가한 길에서 차가 밀리다니, 무슨 일일까? 의아해 하는데, 또 기사인 아무르가 선그라스를 벗는다. 장례식 차량인가보다. 옆자리의 현욱씨가 눈치를 채고 얼른 모자를 벗는다. 화장장이란다. 장례 차량이 화장장으로 진입하면서 중간 중간에 술과 우유를 뿌린다. 마치 고수레를 하는 것 같다. 죽은 이의 영혼이 받아먹는 고수레일까? 아니면 다른 영혼들에게 죽은 이의 영혼이 신고를 하는 고수레일까? 초원에서는 죽음조차 푸르러 보인다. 
 
 
▲ 어워는 경계의 표시이기도 하고, 길 안내자이기도 하고, 초원 사람들의 신성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 최성수
   
초원이라고 한없이 평평한 것만은 아니다. 달리다 보면 조그만 구릉도 있고, 아득한 지평선 끝에는 불쑥불쑥 솟은 산맥들도 있다. 그러나 눈 닿는 곳 대부분은 너른 평지다. 그래서 아득하게 넓은 분지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작은 언덕을 넘어서던 차가 갑자기 멈춘다. 아무라가 내리더니 언덕 오른편으로 올라간다. 바라보니 거기 몽골식 성황당인 어워가 있다.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깃발을 꽂아 놓은 풍경이 한 사십 년 전쯤의 우리네 시골 마을 같다. 어워는 마을을 지켜주는 상징적 존재이고, 초원에서는 마을과 마을 혹은 지역을 표시하는 이정표 구실을 하기도 한다. 꽂힌 깃발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는데, 아주 큰 깃대를 꽂은 것은 초크트 어워, 금빛 색깔의 깃대를 꽂은 것은 알탄 어워, 그냥 깃대만 있는 것은 차강 어워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이 어워는 천을 칭칭 감아놓아 깃대의 색깔을 알 수가 없다. 
 
어워에는 말 머리뼈, 술병 같은 것들이 돌 위에 함께 놓여 있다. 누구의 것인지, 목발도 하나 덩그마니 얹혀 있다. 말 머리를 놓은 것은 말의 영혼을 위로하자는 뜻일까? 목발을 두고 간 사람은 자신의 아픈 다리를 낫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원을 여기 놓고 간 것일까?
 
시계 방향으로 어워를 세 번 돌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도 어워를 세 바퀴 돌고 여행의 무사와 안녕을 빈다. 그러자 정말 이번 여행이 무사태평할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 차는 것 같다. 초원에 오면 초원 사람들의 믿음조차 여행자에게 깃드는 것일까?
 
어워를 지나 조금 달리자, 갑자기 나타난 양떼들이 길을 막아선다. 도로 가득 양떼들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차와 맞닥뜨리자 양떼들은 급할 것 없다는 듯 천천히 비켜선다. 길의 주인은 차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몽골 초원의 길은 양떼와 같은 짐승들의 것이다. 우리는 잠시 그 길을 빌려 달리고 있을 뿐이다.
 
“몽골의 양들은 죽기 하루 전부터 제 운명을 알고 운답니다.”
 
아무라가 양떼들을 보며 그런 말을 한다. 양들에 대한 신성을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하긴 국민 숫자보다 양의 숫자가 더 많다는 몽골이니 그런 생각을 지닐 만하다. 양떼들과 함께 잠들고, 양떼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며, 양의 먹이를 찾아 집을 옮기고, 양의 젖과 고기로 생명을 유지하는 몽골인들에게 양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짐승이고 친근한 짐승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겔, 도저한 슬픔의 풍경
 
차는 여전히 벌판 사이로 난 길을 달린다. 한참을 달리면 비탈진 산주름에 하얀 겔이 덩그마니 나타난다. 그저 그 뿐, 아무도 없다. 그저 초록 벌판일 뿐이다. 겔 주위로 목책이 있고, 더러는 텅 빈 짐승 우리가, 더러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말이나 양떼들이 겔을 지키고 있다.
 
그런 겔의 모습은 그대로 도저한 슬픔이다. 이웃에 숨결 나눌 사람 하나도 없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밤이 와 별이 송송 돋아날 것이다. 양이나 말의 콧김으로 캄캄한 밤을 녹일 겔 안의 사람들은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 푸른 초원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흰 게르. 그 풍경만으로도 게르는 도저한 슬픔이다.     © 최성수
 
그런 생각을 하는 틈으로도 차는 달린다. 몇 군데의 벌판을 지나면 어쩌다 산록에 자작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다. 바이칼 타이가 삼림 지대의 자작나무보다 몽골 초원에서 만나는 자작나무는 더 귀티나 보인다. 숲이 드문 곳에서 자라기 때문일까? 
 
초원으로 들어갈수록 더 자주 길을 막는 양 떼와 염소 떼를 만난다. 그럴 때마다 차는 멈추어 서서 짐승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누군가, 길을 막는 양떼들을 보며, ‘밤 먹으러 가니?’하고 중얼거린다. 그렇다, 그 짐승들이 밥을 먹기 위해 건너편 초원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 있는 것이다. 이곳은 바로 그 짐승들의 땅이니까.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들일 뿐이니까. 지나가는 바람을 보고 길을 멈출 짐승은 세상에 없으리라. 양과 염소들은 우리를 바람 한 점처럼 흘낏 바라보고 여전히 제 갈 곳을 찾아 길을 건넌다.
 
 
▲ 민들레 곁에 조름 굴이 있다. 온갖 꽃들이 피어 초원은 그냥 푸른 풀밭이 아니라 어울려 사는 땅이 된다.     © 최성수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빗방울이 몇 점 차창에 내려앉는다. 초원이 더 싱그러워진다. 길 가로 가시풀들이 돋아 있다. 여린 꽃들과 어울려 빗줄기 속에서 빛나는 초원의 풀들! 산 능선은 흐린 하늘에 안겨 있고, 하늘은 초원을 품고 있다. 마음이 느긋하고 잔잔해 지는 풍경이다. 
 
졸다가 깨면 하나씩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이라고 해야 열 채도 채 안 되는 겔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다시 햇살은 쨍쨍하다. 비가 내리는 곳을 지나온 것이리라. 산을 하나도 넘지 않고, 같은 초원에 어느 곳에는 비가 오고 어느 곳에는 햇살이 내리쬔다. 평생은 산 자락에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낯설고도 설레는 풍경이다. 


  유목에서 정착으로 가는 길

군데군데 초원이 벗겨진 땅이 있다. 네모반듯하게 갈아놓은 땅의 속살이 붉다. 황토보다는 붉고 짙은 땅이 그림 같다. 사람의 노동력으로는 개간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그 땅을 트랙터가 갈아엎는 곳도 있다. 저 너른 땅에 보리를 심는단다. 
 
유목민이 정착민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그 밭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저 밭을 일구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은 초지를 따라 이동하지 않으리라. 주섬주섬 겔을 헐어 마차에 싣고 또 다른 풀밭을 찾아 떠나지 않으리라. 한 곳에 머무르며 기계로 대규모 작물을 심고, 물을 길어 올려 자라게 하고, 대량 수확을 해서 팔아 돈을 마련하리라. 그리고 그 돈으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무한 소비의 삶 속으로 자신을 내맡기리라.
 
 
▲ 갑자기 말을 타고 달려온 소년이 싱긋 웃고는 달려 사라진다. 초원의 신기루 같은 한 순간이 그렇게 지나간다     © 최성수
 
문득 이제는 중국 땅이 된 내몽고자치주 생각이 난다.  한때는 넓고 넓은 초원이었다는 내몽고는 이제 사막에서 자라는 낙타풀도 듬성듬성한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내몽고 초원이 황폐화한 것은 중국이 점령하면서 유목민을 농경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다고 한다. 유목민은 양이나 소에게 풀을 뜯기되, 다음 해의 목축을 생각해 풀을 완전히 없애버릴 정도로 먹이지는 않는단다. 그러나 농경은 초원의 풀을 모두 없애고, 거기에 작물을 심으니, 초원은 점점 사라져버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농경은 다량의 물이 필요하고, 그래서 초원의 물이 말라버리게 되어 빠르게 사막화가 진행된다. 사막에 나무를 심는 사람은 먼저 방풍이 될 울타리 나무를 심고(이 나무들은 결국은 죽게 된다고 한다), 풀씨를 심어 자라게 하고, 그 풀밭 위에 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풀이야말로 초원에서는 가장 중요한 생명 유지의 뿌리인 셈이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문화혁명 당시 내몽고에 많은 한족들이 들어가 농경을 시작하면서, 늑대를 많이 잡았다고 한다. 늑대 가죽을 얻기 위해서였단다. 그러자 양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 양떼들이 풀을 다 뜯어먹어 버렸는데, 거기에 농경 재배까지 하게 되어 초원이 사막으로 바뀌고 말았단다.
 
어느 주장이든, 결과적으로 초원은 이제 황막한 사막이 되어버렸고, 그 사막의 바람이 봄이면 어김없이 우리나라에까지 황사 먼지를 날려 보낸다. 오랜 세월 농경의 삶을 유지했던 땅과 목축의 삶을 유지했던 땅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기후와 토질과 온갖 생태적 조건들이 유목이나 농경을 그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런데 자본의 논리는 이제 환경을 인위적 힘으로 바꾸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농경의 땅이 목축의 땅이 되기도 하고, 유목의 땅이 농경의 땅이 되기도 한다.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자연의 반란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매서운 바람과 사나운 모래먼지, 물 부족으로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리는 결과는 어쩌면 자연에 대항한 인간에게 자연이 되돌려주는 재앙인지도 모른다.
 
이 넓고 푸른 초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막으로 뒤바뀌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나는 끝 간 데 모르게 아득한 보리 심을 밭을 바라보며 빌어본다. 그만큼 몽골 초원의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올디아스 그늘에서 점심을 먹다
차가 달리는 오른편으로 긴 강이 나타난다. 초원에서 만나는 강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강은 마치 펼쳐놓은 비단 폭처럼 벌판에 눈부시게 놓여 있다. 하라강이다. 그 강을 끼고 몽골 제2의 도시라는 다르항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탄 차는 다르항을 흘깃 곁눈질만 하고 계속 달린다. 길 따라 야생화들이 노랗게 얼굴을 들고 있다. 길이 풀섶보다 더 따뜻해서일까, 야생화는 길 가에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다. 차가 달리면 노란 얼굴의 야생화들이 함께 달리는 것 같다. 그리고 눈을 들면 온통 구릉들이 이어진다. 구릉 위로는 파란 하늘과 쨍쨍한 햇살이 눈부시다. 
 
 
▲ 구릉과 하늘이 어울려 빚어내는 눈이 시린 초원 풍경     © 최성수
 
아득한 초원 저쪽에서 점처럼 말이 한 마리 빠르게 달려온다. 눈여겨보니, 한 소년이 말을 타고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중이다. 그 소년의 모습이 그대로 초원이고 풀 위에 부는 바람이다. 바라보는 내 가슴이 시원해진다. 
 
한참을 달리는데, 길 가 언덕 위로 낙타 두 마리가 보인다. 한 사내가 고삐를 끌고 지나가고 있다. 차를 세우고 내려 낙타 구경을 한다. 사막이 아니라 초원에 낙타가 있는 것이 신기하다. 쌍봉낙타다. 야생화가 그들먹하게 핀 초원에서 낙타는 멈춰 풀을 뜯어 먹는다. 야생화를 먹고 자라는 낙타의 몸에서 향긋한 초원의 향기가 날 것 같다. 
 
길가로 온통 야생화다. 패랭이꽃이 있고, 바람꽃처럼 생긴 것도 있다. 민들레가 점점이 피어있는 곳에는 땅 속으로 굴이 파여 있다. 조름이라는 초원 다람쥐의 굴이란다.
 
 
▲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낙타가 풀을 뜯는다. 그 풀은 야생화다. 낙타의 몸에서 야생화 향기가 날 것 같다     © 최성수
 
한참 초원의 바람을 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여전히 초원이 이어지고, 어쩌다 버스 정류장이 나타난다. 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초원 속으로 놓여있다. 아득하고 막막하고, 그리고 푸르다! 푸르고, 시리다!
 
햇살은 한낮이 될수록 점점 더 뜨거워진다. 점심 무렵이라 속이 출출하다. 그런 눈치를 챘는지, 아무라가 차를 길 밖으로 몬다. 길은 초원에 그어놓은 금일뿐이다. 길을 벗어나면 그냥 초원, 그런데 그 초원에 차가 들어서면 그곳도 길이 된다. 그러니 길이면서 초원이고, 초원이면서 길이다. 
 
차가 강가에 닿는다. 허르헝강이다. 그러나 햇볕을 가릴 나무 그늘 하나 없다. 물가 쪽으로 나무들이 늘어서 있지만, 강물에 닿아있어 앉을 공간이 없다. 초원에서는 그늘도 귀한 법이다. 뙤약볕 아래서 아침에 싸 온 도시락을 먹을 생각을 하니 먹지도 않았는데 목이 멘다. 
 
 
▲ 허르헝 강. 먼 길을 달려온 탓인지 강의 몸이 흙빛이다.     © 최성수
 
햇볕을 가리키고, 고개를 가로젓자, 아무라가 다시 차를 몰아 조금 강 아래쪽 초원으로 간다. 거기 덩그마니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올디아스 나무란다. 제법 그늘이 드리워 있다. 그 그늘에 앉아 초원 위의 점심을 먹는다.  
 
아침에 싸 온 도시락이다. 그런데 밥을 한 숟가락 떠 넣을 때마다 서너 번 씩 팔을 휘저어야 한다. 모기 때문이다. 몽골 초원의 모기들은 한낮에도 극성스런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햇살이 쨍쨍한데, 모기는 오랜만에 만난 인간의 피에 신이 났는지, 마구 달려든다. 그래도 풍경은 기가 막히다. 
 
 
▲ 올디아스 나무 그늘 아래서의 점심. 초원에서는 나무 그늘조차 귀한 법이다.     © 최성수
 
나는 얼른 밥을 먹고, 주변 산책을 나선다. 물이 흘러간 자국만 남은 마른 개울이 있다. 말라 죽은 나무들도 있다. 물이 흘러 나무들이 자라다가, 물이 마르자 제 몸을 말려버린 것일까? 마른 나무를 보니, 초원 생명들의 순환이 보이는 듯하다.
다시 차가 움직인다. 달려온 길이 250km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가야 할 길이 약 200km다. 가도 가도 초원, 초원 위의 길, 때때로 나타나는 사행(蛇行)의 물길을 향해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최성수 기자는 강원도 안흥에서 태어나, 국민대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문학과 국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한문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을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만들었고, 우리나라 한문 고전 중에서 전형적인 글들을 뽑아 『함께 읽는 우리 한문』을 그 모임의 선생님들과 같이 엮어 냈습니다. 1987년 『민중시』 3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과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등을 냈으며, 『강의실 밖에서 만나는 문학 이야기』, 『가지 많은 나무가 큰 그늘을 만든다』등의 책을 썼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읽는 우리 시 100』, 『선생님과 함께 읽는 신동엽』, 『강의실 밖에서 만나는 문학 이야기』, 『교실에서 세상 읽기』 등의 책을 엮어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경동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사입력: 2009/01/01 [21:13]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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