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바야스갈란트, 그 편안한 즐거움
좌충우돌 15일 몽골 북중부 표류기 ②
 
이시백

▲ 하라강가의 염소들     © 이시백
 
아침 6시 40분경에 눈을 떴다. 게스트 하우스 구석의 좁은 식당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해결했다. 짐을 밖으로 옮기고 차를 기다리는데, 한 대가 오지 않는다. 원래 가기로 했던 델리카 운전사가 사정이 있어 못 오고 '바토르'라고 하는 운전사가 스타렉스를 몰고 대신 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수용하기로 했다.

보름 가까이 먹고 잘 짐들을 싣자니 우선 그 양이 적지 않았다. 전에는 우리가 구입했던 생수며, 간식거리에서 과일까지 여행사 측이 준비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차마다 남자 여행자들을 선탑하고 지난밤에 사다리 놀이로 배정한 여성 여행자들이 두 명씩 탔다. 거기에 안내원 한 명씩이 타니 차마다 운전사 포함 5명이 탑승한 셈이다. 짐들이 많아 더 타려고 해야 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선도차인 미쓰비시 파제로 앞자리에 앉으려는데, 안내인 버기가 타고 있다. 그녀는 여행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으므로 운전사와 앞자리에 앉아 길을 안내하여야 한다고 능숙한 영어로 설명했다. 몸집이 큰 편인 내가 뒷자리에 앉자니 긴 여행에 불편하여 일단 시내를 벗어나면 자리를 바꾸기로 했다.

"해브 어 나이스 저니!"

게스트 하우스 사장의 환송을 받으며 차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거리의 차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바람의 나라에 바람이 없다

고비 쪽으로 가던 남쪽 길과는 반대로 차는 북쪽 노선을 따라 시내를 벗어나갔다. 외곽 주유소에서 차들이 주유를 했다. 주유소에 적혀 있는 기름값은 우리보다 약간 쌌다. 경유 1리터에 1350뚜그릭. 산유국 치고는 결코 싸지 않은 유가이다. 알다시피 몽골은 산유국이기는 하지만, 정유시설이 없어 원유를 수출해서 비싼 정제유를 수입한다.

훕스굴로 이어지는 길은 생각보다 양호한 포장도로였다. 앞차를 추월하며 마주 오는 차와 치킨 게임을 하듯 정면으로 달리다가 코앞에 와서야 급히 차선을 바꾸는 장면이 아찔하다. 안전운전을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지난 해, 훕스굴로 가는 비행기를 놓친 한국 여행자들이 차량으로 이동하다가 전복되어 몇 명이 사망하는 사고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넓은 초원길을 달리는데 어쩌다가 차가 전복되었을까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차들은 누구를 말할 것도 없이, 틈만 나면 앞에 가는 차를 추월하기를 본능이나 취미로 여기는 듯했다. 심지어 같은 여행단의 차들끼리도 뒤처지거나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증후군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는지 가히 짐작이 된다. 유럽 원정에 나선 몽골의 기마병들이 하루에 300킬로미터를 이동했다는 소리가 허황된 말만은 아닌 듯 여겨졌다.

▲ 유채밭     © 이시백
직선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변에는 길게 땅이 파헤쳐져 있었다. 나중에 물으니 상수도관 매설 공사라고 하는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 작업만 하려고 해도 엄청난 공역과 예산이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비와는 다르게 초지는 일정한 간격으로 벗겨져 있었다. 무엇을 하려고, 무엇으로 저렇게 큰 면적의 초원을 개간했는지 궁금했는데, 그 답은 차도 변에 거대한 면적으로 심겨진 밑밭과 유채밭으로 풀리게 되었다. 밀 농사를 하는 지역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니 참으로 장대한 농사였다. 농업용수만 제대로 공급된다면 참으로 농사짓기 좋은 땅이었다. 호레이즘을 정벌하고 이슬람의 비옥한 농지를 점령한 뒤에 초지를 만들어 유목을 하게 했다는 칭기스칸이 지금 초지를 벗겨내어 월드컵 축구장의 몇 곱은 되는 유채밭, 밀밭을 일군 모습을 본다면 무엇이라 할까.

이미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인지도 몰랐다. 울란바타르에 버글거리고 사는 절반의 몽골인들은 칭기스칸보다는 러시아의 풍속에 익숙해져 있는 게 현실이었다. 말을 왼편에서 타는 지도 모른다는 울란바타르의 청소년들뿐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품에서 지내던 시절에 그들은 '칭기스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 되었었다. 몽골 공산당 서열 2위의 인물이 칭기스칸 동상을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자리에서 쫓겨나 숙청되고, 그도 모자라 불의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니 그들에게 칭기스칸은 전설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바뀌었다. 칭기스(chinggis)는 이제 몽골에서 최고품을 뜻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칭기스 호텔, 칭기스 보드카... 몽골에서 물건을 고를 때 잘 모르면 무조건 칭기스라는 상품을 고르라고 하지 않던가.

일자로 뚫린 포장도로로 차는 시원하게 달린다. 양옆으로 펼쳐진 초원의 풍경은 고비보다 더 짙고 풍요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갈라놓은 아스팔트와 시야를 가로막는 전주와 전선이 눈에 거슬린다.

포도에서 벗어나 초지로 차가 내려선다.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하라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가잔다. 차에서 식탁이 내려지고, 아홉 개의 의자가 강가에 놓인다. 안내인들이 능숙하게 감자를 깎고, 양파를 벗기며 볶음밥 비스름한 요리를 만드는 동안 한 시간이 걸렸다.

▲ 하라 강가의 목부     © 이시백
 
강가에서는 말을 탄 목부가 소를 강으로 몰아 건너는 풍경도 보고, 무리에서 벗어난 소가 쓰레기 더미에서 비닐을 맛있게 삼키는 장면도 보고,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준비해 온 낚시에 일없이 곁에서 어정거리다가 붙잡힌 메뚜기를 미끼로 꿰어 누런 강물에 던지기 무섭게 버둥거리며 낚여 나오는 붕어 비스름한 물고기도 보았다.

그리고 '풀밭의 식사'도 맛있게 했다. 문제는 날씨였다. 바람의 나라에 바람이 없는 날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삼십 도가 넘는 뜨거운 볕에도 늘 바람이 불고 습도가 낮았던 고비에서는 견딜 만했는데, 북으로 올라갈수록 물이 흔한 탓인지 날은 바람기도 없이 후덥지근했다. 그늘이라고는 옆으로 누운 염소 그림자 밖에 없는 강가에서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빛을 두어 시간을 삶고 나니 모두가 지쳤다. 몽골 여행의 절반은 하늘이 열어 주는 날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는 첫 번째 날이다.

여행자들이 식사를 하고, 그 뒤에 안내인과 기사들이 식사를 하고,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다 보니 조리 시간을 포함하여 근 두어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쉴 틈 없이 차안에서 흔들리는 중간에 이렇게 두어 시간 놓여날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행복'에 가까운 일임에도 순전히 날씨 탓인지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졌다. 시간이 너무 길다는 여론에 이후 점심은 우리가 알아서 간단히 먹겠다고 했다. 가이드들은 난데없이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 외려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라면을 끓여 먹어도 한 시간은 넘겨 걸렸으며, 굳이 쉬는 시간을 줄여가면서까지 차안에서 흔들릴 마음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다.

아마스바야스갈란트로 가는 첫날의 여정은 유난히 후덥지근하고 더운 날씨로 힘들었다. 에어컨이 없는 차에 탄 여행자들의 고충이 컸고 그만큼 불만의 목소리도 높았다. 불행하게도 이 차는 이번 여행의 선도 역할을 맡은 모기의 델리카였고, 이 차는 이후에도 여러 가지 고장을 일으켜 불행한 탑승자들을 힘들게 했다.

사실 삼십 도를 훌쩍 넘는 고비에서도 에어컨을 튼 차를 본 적이 없을 만큼 몽골 여행에서 에어컨은 바람이 대신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 만나는 이 날의 더운 날씨가 화근이었다. 차라리 세 대의 차 모두가 에어컨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별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에어컨이 없는 차가 어디 있느냐는 항의에 밀려 불운한(?) 모기의 델리카는 결국 이튿날 자신의 수당에서 까기로 하고 에어컨 가스를 주입하게 되었고, 이후로 그는 서늘해진 날씨로 그 에어컨을 한번도 돌려 보지를 못하였다. 그의 에어컨은 내년의 여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편하지 않은 '편안한 즐거움'


▲ 아마르바야스갈란트 사원     © 이시백
 
우여곡절 끝에 오후 6시 가까이 되어서 아마르바야스갈란트(amarbayasgalant) 사원에 도착했다. '편안한 즐거움'이란 뜻의 이 사원에 결코 '편하지 않게' 도달한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원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입장료는 외국인의 경우 일인당 3000 뚜그릭이다.

세렝게(selenge)아이막 바롱부렝(baruunburen)솜에서 4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이 사원은 청나라 황제가 몽골 불교지도자인 쟘마바자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물론 사원을 짓는 공역과 돈은 몽골인들이 대야 했다. 청은 제국을 경영한 몽골족을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라마불교를 이용했다. 장자만이 가업을 승계하고 이후의 아들들은 모두 승려가 되도록 강제한 시책도 결국은 몽골족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몽골에 라마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1230년대 오고타이 때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세조 쿠빌라이가 1253년 티베트를 점령하여 동자 승려인 파스파를 초청한 후로 몽골 왕실의 후원과 보호를 받으며 라마불교는 전역에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1736년에 완공될 당시만 해도 40여 개의 건물이 있었다는 이 사원은 스탈린 시대의 종교 탄압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28개의 허름한 건물만이 남아 있다. 몽골의 사원들은 때로는 몽골인들을 억누르는 방편으로, 때로는 억눌림을 이겨내는 기제로 제국의 흥망과 함께 성쇠를 같이하게 된다.


▲ 소원 탑     © 이시백
불교의 신심이 두터웠던 만주 황제의 명에 의해 지어지게 된 이 사원의 전체적인 구조는 왕의 명령으로 세웠다는 표시인 담장 바깥의 벽이 선 1영역을 시작으로 모두 7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담장과 문으로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둘러처진 각 구역들은 '지붕 없는 절'을 비롯하여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 빌고 나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석탑, 두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깃대 치가(chiga), 1대 벅뜨인 쟘마바자르의 미라가 있었다는 6영역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책들은 소개하고 있었지만, 그곳의 어느 누구도 그런 사실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잊혀진지 오래된 사실인지도 몰랐다.

사원의 한 곁에서는 비각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절을 짓게 된 동기와 황제의 칙령들을 적어 둔 비각이라고 하는데, 무더운 날씨에 웃통을 벗어젖힌 제국의 후예들이 지붕에 기와를 얹고 있었다.

▲ 청소하는 어린 승려들     © 이시백
이 절에는 우리나라에서 보낸 종을 비롯하여 인연을 잇고 있다 하는데, 사원 안마당에서는 어린 승려들이 한창 마당 청소에 열중이었다. 윗연배 하나가 팔짱을 끼고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승려들은 입에 머금은 물을 마당에 뿜어가며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현재 이 사원에는 어린 승려들을 포함해 26명이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절을 지을 자리를 찾아다니던 승려들이 이곳을 정한 뒤, 인근의 양 치는 아이 둘을 보고 그 선한 눈빛에 이끌려 두 소년의 이름인 '아마르'와 '바야스갈란트'로 이 절의 이름을 지었다 하니, 마당에 물을 뿜으며 청소를 하는 어린 승려들이 행색은 비록 남루하지만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제습제를 먹던 밤

사원 뒤편에는 좌우의 높은 산정에 탑전을 세우는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유비에서 이곳까지 도로가 연결되며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될 예정이라는데, 그에 비해 인근의 숙소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허름한 식당 마당 앞의 겔 두 채. 그것도 한 채는 망만 둘러놓은 상태였다. 숙박은 당연히 고비 여행처럼 여행자들을 위하여 지어 놓은 캠프장의 겔에서 묵을 줄 알았던 나는 가이드 버기에게 항의해 보았지만 피차 당황하는 눈치였다. 캠프장이 인근에 없으면 야영을 하든, 민박을 할지 몰라도 가까이 캠프장이 있는데 어째서 민박을 하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답변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캠프장에 묵을 경우, 1인당 60달러가 소요되는데 여행사에서 책정한 1인당 숙박료는 5달러였다. 뒤늦게 영문으로 된 문서를 꼼꼼히 살펴보니, 어디에도 캠프장에서 묵는다는 말은 없고 그저 'ger'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비 여행처럼 그것이 당연히 여행자 캠프의 겔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한 것이 착오였다.

여성 여행자들이 묵을 겔은 비교적 양호했지만 샤워 시설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온종일 후덥지근하니 땀과 먼지를 뒤쓴 몸을 씻을 데가 없으니 황당할 일이었다. 급기야 인근 캠프장에 자기 돈 2,500원씩을 내고서라도 샤워를 하러 가겠다고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마저 일인당 5천원을 내라고 올리는 바람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항의를 받고, 영문을 모른 채 당혹스러워하는 (나중에서야 이곳의 여행 방식이 대체로 이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이드가 급히 물통 하나를 가져다주어 번갈아가며 고양이 세수를 하게 되었다. 손으로 물을 받아서 얼굴과 손발을 씻으며 기가 막혀 했지만, 그것은 대단한 호사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샤워를 못한다며 불평을 하던 여행자들은 그 뒤로 생수 한 컵을 가지고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는 날들을 보내고 어떤 날은 그마저 하지 못한 날도 맞게 된다. "씻을 물이 없냐"는 물음에 지극히 태연하게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먹을 물마저 말을 타고 먼 곳까지 가서 길어 와야 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씻을 물이 없다고 화를 내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피차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같은 여행사의 다른 팀들이 먼저 와 있었다. 프루공에 서양인을 포함한 서로 다른 세 팀, 다섯 명이 타고 왔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부부도 있었는데, 이런 류의 여행에 익숙한 듯 우리 팀이 쓰게 될 겔이 자신들의 겔보다 좋다고 약간 투정을 하기는 했지만 샤워니, 캠프장이니 하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더욱이 낯선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한 겔로 다정히 들어가는 뒷모습을 대하자니 더 이상 불평이 나오지를 않았다. 훕스굴에서 돌아갈지, 아니면 고비까지 갈지 생각 중이라는 부부 팀은 고비를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 가이드에게 캐물었다.

저녁 식사로는 가이드가 해 준 '츠왕'이라는 몽골식 잡채를 먹었다. 먹을 만했다. 남자 숙소로 쓸 겔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물으니, 그 안의 침대를 주문했는데 아직 오지를 않는다면서 주인 할머니는 자신들의 내실을 쓰라고 했다. 식당 겸 가게로 쓰는 벽돌로 지은 건물의 안쪽에는 주인네가 기거하는 방이 있는데, 겔보다 넓고 깨끗했다.

▲   비각 앞의 어린 승려  ©  이시백
 
상당히 길고, 무덥고, 황당한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모기마저 기승을 부리더니 밤이 되자 비로소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하던 더위가 말끔히 씻어지며 비로소 몽골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더위에 시달리고 여행 첫날의 어수선함에 얼이 나갔는지, 육포 포장을 뜯다가 그 안에 든 제습제를 후추소금인 줄 알고 한참을 찍어 먹었다. 첫날 여행을 통해 몽골에도 우기는 후덥지근하니 습도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럴 경우, 제습제를 먹으면 습기 제거에 약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아, '편안한 즐거움'은 언제나 괴로움 뒤에 오는 것.  바람 불고 비 오는 오랜된 사원의 밤에,  비각 앞에 서서 맑게 웃던 어린 승려가 꿈속에서 그리 말했다. 

        [ http://cafe.daum.net/gomongo 에 가면 몽골에 관한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이시백 기자는 소설가로 수동에서 텃밭을 일구며 주경야독하고 있음. 주요 저서로는 장편소설 <사자클럽 잔혹사> <나는 꽃도둑이다> <종을 훔치다>와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누가 말을 죽였을까> <갈보 콩> 등이 있으며, 제1회 권정생 창작기금과 2012 아르코 창작기금, 2014 거창평화인권문학상, 11회 채만식 문학상을 받음.
 

기사입력: 2010/08/19 [20:28]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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