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강노르, 달콤한 젖의 하얀 호수
좌충우돌 15일 몽골 북중부 표류기 ⑦
 
이시백
▲ 아르항가이의 목부     © 이시백

날은 맑고 조금 서늘하였다. 밤새 물소리를 들려주던 개울에 얼굴을 씻는다. 흐르는 물에 들어가 몸을 씻거나, 오물을 버리면 사형에 처한다던 빌맄(칭기스칸 어록)이 생각나 손에 물을 퍼담아 고양이 세수를 한다. 몽골 운전사들이 내려오더니 텀벙 물에 들어가 발도 씻고 머리도 감는다. 물을 귀히 여기던 빌맄의 엄중함도 이제 호랑이 담배가 된 모양이다. 얼굴에 와 닿는 개울물은 차갑기만 하다. 그 물에 머리를 담그는 몽골 운전사들을 보자니 내 몸에 한기가 느껴진다.
빵과 누룽지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8시경 차강노르를 향해 길을 나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운전사 모기가 고장났던 델리카를 고쳐서 와 있었다. 파제로를 몰고 왔던 뉴 모기는 차와 함께 떠났다.

끝없이 이어지는 대평원에는 보리처럼 기다란 풀들이 바람에 은빛 물결을 일으키며 흩날린다. 평원 사이로 차가 지나가면서 남긴 외줄기 길이 처연하다. 누가 저 막막한 길을 달렸을까. 지나고 나면 내가 몸을 얹은 차도 그렇게 막막한 길을 남기겠지만....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 차강노르 가는 길     ©이시백

10시 50분경, 야트막한 개울을 건너 노란 빛을 띤 바위들이 나타난다. 희귀한 광물질이 포함된 것으로 뵈는 바위들은 비바람에 깎인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행자 한 사람이 몇 해 전에 고비 여행 때의 운전사를 만났다고 한다. 운전사끼리 인사를 나누는데, 낯이 익어 살펴보니 예전에 고비 벌판을 웃통을 벗은 채 맨몸으로 차를 몰던 운전사라고 했다. 그의 이름도 모기였다. 구 모기, 신 모기에 고비 모기까지 늘었다.

몽골인의 이름은 대체로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독수리나 꽃 같은 자연에서 따오는 것이 많다. 재미 있는 것은 이름이 좋으면 부정을 탄다 하여 개똥이니, 쇠똥이로 부르던 우리네 풍습처럼 몽골인들도 '돼지의 자식'이니 '이름이 없음'처럼 험한 이름을 짓기도 한다. 또한 아버지의 이름을 자식이 성으로 삼아,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듯한 작명법은 그 가계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는 몽골인의 민족정신이나 전통사상을 끊으려는 러시아의 의도 때문이라 한다.

한참을 달리자니, 모기의 델리카가 보이지를 않는다. 이쪽 지리를 잘 알기 때문에 선도 역할을 하던 그의 차가 사라졌으니 제 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를 않는다. 작은 구릉들이 잇닿아 있어 자칫 그 너머로 사라지면 찾기가 어렵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름길로 갔다고 했다. 가이드 책임자인 버기가 그에게 앞서 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손톱의 때는 어디로 갔을까

라면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하는데, 주먹밥이 등장했다. 아침에 남은 밥을 꾹꾹 눌러 주먹밥을 만들어 가져 왔는데, 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그릇 안에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맛있게들 먹는데. 문득 아침에 주먹밥을 만들던 여자 분들이 주고받던 말이 생각났다. 주먹밥을 싸고 나니 손톱 밑의 때가 말끔히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아, 안 들어도 좋았을 그 말이 생각나 나는 주먹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많던 때는 어디로 갔을까.

점심을 먹고 나서 차는 아르항가이로 접어든다. '항가이 산의 뒤편'이라는 지명처럼 상당히 높은 산길이 나타난다. 멀리 검은 항가이 산맥이 보인다. 

 
▲ 개울을 건너는 말들     ©이시백

길은 도처에서 개울을 만난다. 우기 탓에 개울들이 불어 나 있었다. 몽골 사람들에게는 강이라 불리는 길들은 바위를 쪼아낸 듯 울퉁불퉁하고,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다. 차가 지나가는데도 눈을 뜨고 자는 토끼도 보았고, 마실을 다녀오는 듯한 마부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유유히 개울을 건너는 것도 보았다. 푸른 델을 입은 목부가 물끄러미 지나가는 여행자를 본다. 그의 눈에는 이편이 눈 뜨고 자는 토끼만큼 신기한가 보다.

어느 마을을 앞두고, 이리저리 구부러진 개울과 만난다. 제법 물이 깊어 보이는 길을 타이왕이 먼저 옷을 벗고 들어가 깊이를 잰다. 허리까지 찬다. 발로 더듬어 찾아낸 얕은 지점을 따라 세 대의 차가 무사히 물을 건넌다.

어렵게 도착하여 오랜만에 만나는 마을이건만 잠시 머무름도 없이 스쳐 지나간다. 마을의 집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미로 같은 골목을 이리저리 빠져나가 다시 마을 밖으로 나선다. 동구밖에는 지나가는 차들에게 통행료를 받는다는데, 운이 좋은 탓인지 그냥 지나가게 되었다. 
 

▲ 들꽃 만발한 개울     © 이시백


오후 6시경, 개울을 건너다 델리카가 빠져서 파제로 지프가 줄을 걸어 꺼냈다. 델리카는 사륜구동을 하려면 앞바퀴 축에 무엇인가를 끼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고비를 여행할 때는 몰랐는데, 델리카는 차폭도 좁고 힘도 약해서 험한 길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거기에 비해 스타렉스는 깊은 개울도 잘 건너고 무엇보다 실내가 넓고 승차감도 좋았다.

꽃가루 알러지가 있어서 창문을 닫고 끊임없이 에어컨을 트는 파제로의 기사 톳싸 때문에 편도선염이 심한 나는 바토르의 스타렉스차로 옮겨 탔다. 나이가 지긋한 바토르는 어찌나 차를 아끼는지 문을 조금이라도 세게 닫으면 안색이 바뀌었다.

항가이 산이 가까워지는지 차는 산길로 접어 들었다. 산마루에 놓인 오워에 닿아 모두 무사여행을 빌며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 돌았다.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눈치 빠른 가이드 민주가 오워 부근의 겔로 달려가 무언가를 사들고 온다. 호슈르이다. 기름에 튀긴 만두인 셈인데, 배가 고픈 탓인지 꿀맛이다.

테르킨의 차강 노르 

▲ 차강노르 가는 길     © 이시백

오후 7시경, 산을 내려와 노란 꽃들이 만발한 습지를 지난다. 길은 완만해지며 금방이라도 눈부시게 흰 호수가 나타날 듯하다. 몇 구비를 돌자니 드디어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차강 노르이다.

차강은 우리 말로 '희다(白)'라는 뜻이다. 차강노르는 '하얀 호수(white lake)'라는 뜻으로 제대로 된 명칭으로는 '테르킨 차강 노르'(the lake of terkhiin tsagaan nuur)이다. 차강 노르라는 명칭을 지닌 호수가 다른 곳에도 많기 때문에 테르킨에 있는 차강노르라는 것을 밝혀 말한다. 몽골에서도 흰색은 길한 상을 뜻한다. 우리의 설날과 같은 명절을 몽골에서는 차강사르(흰 달)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를 '흰 사람'이라고 하는데 비해, 남자는 '검은 사람'이라 한다. 생산과 번영을 중시 여기는 모계중심의 의식이 담겨 있는 듯하다.
 

▲ 차강노르     © 이시백


바위들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길에 오르니, 시원하게 트인 호수와 외줄로 벋은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를 가나 강을 끼고 살며 여기저기 산을 가로막은 댐이며 호수들이 괴어 있는 나라의 여행자로서는 그다지 감회가 깊지는 않다. 막막한 초원을 달려와 만나는 호수이니 별스럽다는 느낌 정도라고나 할까. 내 눈에는 검푸르게 뵈는 이 호수가 왜 하얀 호수로 불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물이 귀한 내륙의 유목민들에게 이 호수가 그야말로 젖처럼 달콤한 '하얀 호수'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호수보다는 그 곁에 그어진 오롯한 길들이 아련히 가슴에 스민다. 밤이 되어 호수 위로 후드러지게 떨어지는 별들을 보게 되기를 바라지만, 날은 흐릿하고 바람이 서늘하다. 보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아름답게 남는 것이 여행이 아닐까 싶다.

호수 가장이로 이어진 길을 한참이나 달려서 드디어 오늘 밤을 묵을 캠프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다행히 전화가 되어 미리 예약을 해 둔 탓에 힘들이지 않고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날은 벌써 어둑해지는데 물가라 그런지 날이 춥다. 겔 안에는 난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나무를 집어넣다가 연통이 빠졌다. 뜨거운 연통을 다시 끼워 넣을 수가 없어 캠프장 주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인장은 쓰러진 연통을 보며 몹시 화를 내며 가이드에게 야단을 쳤다. 난로나 연통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이걸 잘못 건드려서 그런 것이라는 소리 같았다. 아마 화재나 화상을 입을까 싶어 놀란 모양인데 조금 역정이 지나치다 싶었다. 모처럼 몽골 사람의 화난 모습을 보게 된 것도 소득이었다.

오늘은 스텝들이 여행자들을 위해 몽골 전통 양고기 요리인 '헐헉'을 만찬으로 준비한다고 했다. 원래는 살아 있는 양을 잡아서 하여야 하는데, 마침 살아 있는 양이 없어서 잡아 놓은 양고기로 조리하기로 했다. 양을 사 오려면 몇 시간을 다녀와야 한다는데, 허기가 져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 헐헉     © 이시백

'헐헉'은 양고기를 토막내어 쇠통에 담은 뒤에 불에 달군 차돌멩이를 넣어 그 열과 증기로 쪄내는 요리이다. 소금과 감자가 들어갈 뿐, 특별한 양념은 넣지 않는 듯하지만 고기가 연하여 몽골에서는 잔치나 귀한 손님에게 내놓는 별식이라 한다. 조리가 되면 큼지막한 양푼에다 양고기들을 담아내고, 안에 넣었던 차돌도 꺼내온다. 뜨거운 차돌을 손이나 얼굴에 문지르면 관절염 등의 치료에 좋다고 하는데, 양기름으로 범벅이 된 돌로 문지르자면 그야말로 온몸에서 양 특유의 노린내가 배일 지경이다.

헐헉을 기다리는 동안 어느 덧 해가 기울며 호수는 붉은 노을로 덮인다. 검붉게 물드는 호수는 장관이었다. 낯익은 말이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한국인 관광객들이다. 이곳에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두 팀이나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일이면 울란바타르로 돌아간다는 여자분들은 고맙게도 남은 고추장을 주었다. 몽골 사람들은 코담배로 인사를 나누는데, 한국인은 고추장으로 인사를 주고받는 셈이었다.
 

▲ 차강노르의 노을     © 이시백

저녁 10시를 넘겨서야 드디어 헐헉 요리가 왔다. 양 한 마리를 잡은 것이라는데 큰 양푼에 가득하다. 코뿔소라도 한 마리 잡은 양으로 뵌다. 늦은 저녁에 별식이 오니 다들 달려들어 맛있게 먹었다. 운전사 바타르가 피곤하다며 그 좋은 헐헉도 안 먹고 일찍 자러 갔다.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모처럼 포식을 하고나니 피곤이 밀려와 몇몇 여행자만 술을 마시고 일찍들 잠자리에 들었다. 머룻빛으로 물든 호수 가장이에서 스르르 흰 꿈속으로 빠져 든다. 바람에 흔들리는 겔 바깥에선 별들이 호수 위로 햐얗게 내려앉고 있었다.

이시백 기자는 소설가로 수동에서 텃밭을 일구며 주경야독하고 있음. 주요 저서로는 장편소설 <사자클럽 잔혹사> <나는 꽃도둑이다> <종을 훔치다>와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누가 말을 죽였을까> <갈보 콩> 등이 있으며, 제1회 권정생 창작기금과 2012 아르코 창작기금, 2014 거창평화인권문학상, 11회 채만식 문학상을 받음.
 

기사입력: 2010/10/23 [16:55]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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