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만 재워 주소
좌충우돌 15일 몽골 북중부 표류기 ⑧ 높고 춥고 쓸쓸한 항가이의 밤
 
이시백

▲ 저물어가는 항가이 고원의 풍경     © 이시백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빵과 누룽지로 간단히 식사를 한 뒤 서둘러 길을 나섰다. 이번 여행의 가장 어려운 노정인 텡게르(mt. tenger) 산으로 가는 날이다. 해는 벌써 차강노르 위로 올라와 있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새벽의 고요한 하얀 호수를 거닐어 보는 행운을 얻지 못했다. 아침 결이라 찬 바람이 불어 호수는 잔 물살을 일으켰다. 

호수 안쪽으로 더 들어가 호르고 화산으로 향했다. 분화구가 있는 호르고 울(khorgo uul)에 가까울수록 여기저기 무더기로 쌓인 화산암들이 눈에 띤다. 그 틈새에 뿌리를 박고 노란 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피어있다. 땅을 뚫고 터져나와 바다 같은 호수를 만든 화산보다 더 강한 것은 생명임을 절감한다.  

호르고 울 앞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나다 

▲ 차강노르의 전망     © 이시백

이리저리 뱀처럼 구부러진 물줄기를 피하느라 꽤 멀리 돌아선 끝에 좁은 개울을 건넌다. 사발을 엎어 놓은 듯 야트막한 산에 이르렀다. 약 8,000년 전 폭발하여 분지를 만들고 거기 물이 고여 차강노르를 만든 화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하다. 해발이 2,240m, 200m 가량의 지름을 지닌 분화구에는 물이 고여 70-80m의 수심을 이룬다고 한다. 산으로 오르려는데 모기의 델리카가 또 말썽을 부렸다. 차 밑에 들어가 앞바퀴 축을 뜯어서 고치고 있는데, 놀랍게도 한쪽의 제동장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손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고 만지작거리는 걸 보면서 조용히 책임 가이드 버기를 불렀다. 다른 것과 달리 브레이크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손으로 고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비소에 가서 고쳐야 하겠다고 요구했다. 제동장치에 문제가 있는 차를 타고 해발이 4,000m에 이르는 텡게르 산까지 갈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 호르고 울     © 이시백

차 문제도 있어 심란하고, 오늘 일정도 여유가 없어 산 아래서 가이드 민주의 설명만 듣기로 했다. 화산의 분화구는 이미 울란 토구 울에서 보았던 터라 그게 그거거니 여기고 생략한 것인데, 나중에 민주는 이걸 보여 주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자신들의 산하를 극진히 사랑하며 긍지를 지닌 마음을 뒤늦게 깨닫고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차강노르를 떠난다. 하늘이 맑아지며 바위가 있는 곳에서 내려다보는 호수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여유만 있다면 그 곁에서 천막을 치고 책이나 보면서 며칠 푹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길 위에 버려지다


▲ 몽골의 식료품 가게     © 이시백

차를 고치기 위해 타시르(tsahir)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가는 중에 먹던 간식거리가 떨어져 가게에 들렀다. 예전의 시골 마을 이장집에서 하던 구멍가게가 생각난다. 음료수와 과자들을 이것저것 고르는 것도 재미있었다. 간식거리를 잔뜩 사서 모처럼 즐거운데, 스태프들의 얼굴이 어둡다.

모기의 델리카가 그곳의 정비소에서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책임가이드인 버기는 모기에게 더 이상 함께 여행할 수가 없다는 통고를 한 것이다. 제동장치가 불완전한 차를 타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이미 지급한 비용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모기는 에어컨 가스를 주입하고 중간에 차를 고치느라 돈이 없다고 버텼다. 울란바트로에서 새 차가 올 동안 텡그리 방향으로 가 달라는 부탁에도 모기는 응하지 않았다. 차에 실린 짐이나 여행자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모기는 텡그리 쪽 길을 잘 아는 유일한 운전사였다. 새 차를 요구하던 내게 '차 문제보다 길을 잘 아는 운전사가 더 중요하다'던 여행사 사장의 말이 바로 모기를 가리키던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결국 옥신각신하는 중에 급기야 버기가 눈물을 흘리고 길을 잘 모르는 운전사들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행사 사장에게 사정을 전하였는데 큰 질책을 받았다고 한다. 추측건대 운전사 급여를 미리 준 것 때문인 듯했다. 모두 해고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동안 온갖 고생을 해 온 스태프들이 급여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며 낙심천만이었다.  

▲ 고장이 잦았던 델리카     © 이시백

결국 모기는 짐과 여행자들을 내려놓고 가 버렸다. 가이드 민주는 '그가 도망쳤다'며 분개했다. 여행 중에 여행자들을 팽개치고 가 버리는 모기의 행동은 무조건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그의 불만도 있음직했다. 여행자들이 원하여 이제 곧 가을이 오면 쓰게 되지도 않을 에어컨 가스도 주입하고, 돈을 들여 차도 고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라니 그도 상심할 만은 했다. 그러나 길도 제대로 모르는 운전사와 여행자들을 노상에 내려놓고 가 버린 그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 일을 어찌 해야 할까. 오죽 답답했으면 가이드들은 노상에서 만난 사람에게 차와 운전을 제안하기도 했다. 집에 가서 아내와 상의해 보겠다던 그마저 못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졸지에 길 잃은 미아가 된 여행자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인근 식당에 들어가 우선 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일을 수습할 방도를 고민해 보았다. 여행자들은 두 대의 차로 끼어타기로 하였지만 세 차 가득 실었던 여행짐들이 문제였다. 가이드들이 이리저리 애쓴 끝에 고맙게도 식당에 짐을 맡겨 두기로 했다. 길바닥에 여행 짐을 풀어 놓고 꼭 필요한 물건들만 다시 쌌다. 그리고 버기가 남아 울란바타르에서 달려오고 있다는 새 차를 기다려 뒤따라오기로 했다. 근 700킬로미터의 거리를 밤새워 달려 하루만에 온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버기와 짐을 남겨 두고, 두 대의 차는 오후 3시를 넘겨서야 다시 텡게르 산으로 향했다. 길에서 우두커니 4시간을 흘려보낸 것이다. 과연 신성하며 쉽게 범접하기 어렵다는 텡게르 산으로 가는 길은 출발부터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운전사들은 여행사가 지정한 길을 버리고, 질러가는 길을 선택했다.

북쪽으로 올라가 텔멘(telmen)을 거쳐 울리아스타이(uliastay)로 우회하는 도로는 비교적 차들이 많이 다니는 평탄한 길로 보였지만, 질러가는 길은 시종 물을 따라 가는 것으로 지도에 그려져 있었다. 우기인데다가 개울가에는 곳곳에 습지가 있어 차가 빠질 염려가 많아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차 문제로 길에서 시간을 많이 빼앗겼으니 질러가는 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며칠이지만 함께 여행을 하던 일행 하나가 빠지니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고장으로 원성을 샀던 모기의 델리카지만 그동안 미운 정이라도 든 모양이다. 그 차에 탔던 분들은 하도 고장이 잦아서 '파란만장 우리 차'라는 제목의 글을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몽골에서 차량들이 오워를 지날 때면 시계 방향으로 세 번을 돌거나, 바쁘면 경적을 세 번 울리고 지나가는데 모기의 델리카는 경적을 울리지 않더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차의 경적을 누가 떼어가는 바람에 울리고 싶어도 울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탄 탓인지 멀쩡하던 스타렉스도 펑크가 났다. 델리카에서 옮겨 탄 사람들의 불운이 따라온 모양이라고 웃었다.

항가이를 넘다
 

▲ 타루박 고기를 파는 몽골 청년들     © 이시백
 
항가이 산들이 가까워질 무렵, 멀리서 말을 탄 청년들이 달려왔다. 멋진 델을 차려입은 청년이 무언가 말을 건넨다. 나중에 들으니, 타루박 고기를 먹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대형 설치류인 몽골초원의 몰못인 타루박은 맛이 좋아 몽골인들이 즐겨 사냥을 해서 지금은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고비에서는 초원의 구멍에서 얼굴을 내미는 타루박을 자주 보았는데, 이번에는 거의 보지를 못했다. 헐헉을 먹은 지 며칠 되지 않은 터이라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 청년들은 운이 별로 좋지 못한 셈이었다.

오후 5시 24분경, 항가이(hangay) 솜에 도착했다. 아르항가이를 지나 이제 항가이 산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차는 용감하게도 항가이 산을 향해 달려갔다. 원래 지도를 보고 처음 가는 길을 가던 운전사들은 3266미터의 둘란 하이르한 울(dulaan hayrhan uul) 등을 위시한 3,000m급의 준령들을 피해 남쪽으로 돌아내려갔다. 조금 낮기는 하지만, 낮은 곳에 있기 마련인 물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어봐야 낯선 지명이니 그저 차에 실려 가파른 항가이 산길을 달려 올라갔다.  


▲ 항가이 고원의 오워     © 이시백
 
멀리서는 검게만 보이던 항가이 산은 쓸쓸하고 가파랐다. 항가이산맥은 알타이 산맥과 더불어 몽골의 대표적인 산맥이다. 몽골 초원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항가이 산에 이르니 평원이 사라지고 가파른 산길을 더듬어 오를 무렵에는 벌써 날이 기울고 있었다.

길이 험한 데다가 초행의 운전사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역했다. 가파른 산을 넘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오워 하나가 쓸쓸히 서 있을 뿐,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산마루에는 양이나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톳싸가 차에서 내려 타이왕과 함께 오워를 돈다. 여태껏 오워를 만나도 톳싸는 돌지 않았다. 진지하게 두 손을 모으고 오워를 도는 톳싸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역했다.

어두워진 고원은 춥고 바람이 거셌다. 오트공 솜에 가서 묵겠다던 계획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고, 어디서든 야영을 해야 하는데 날이 너무 추워 스텝들이 걱정이 많았다. 날이 어두위지니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든 구루반블락(gurvanblag) 못 미처 고원에서 하룻밤을 보내야할 상황이었다.

요행히 지나가던 차를 만나 나무가 있는 곳을 묻는다. 이 부근에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처음에는 바람을 막을 숲을 찾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불을 피울 나무들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르갈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바람이 차가운 산마루에는 그 흔하던 양들도 모습이 뵈지 않는다.  

하룻밤만 재워 주소 


▲ 개와 아르갈     © 이시백

얼마쯤 달려가던 차가 멈추고 아르갈을 발견했다. 그리고 눈이 좋은 톳싸가 어디론가 차를 몰아간다. 멀리 겔이 두어 채 보인다. 사람이다. 무서운 개가 먼저 보고 짖으며 달려나온다. 어둡고 추운 산에서 밤을 새울 걱정을 하던 입장에선 무서운 개도 반갑기 그지없다. 겔 가까이 잔득 쌓여 있는 아르갈도 반가웠다.  

▲ 항가이고원의 겔     © 이시백
 
운전사와 가이드가 주인을 만나 통사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만약에 재워주지 않는다해도 겔 부근에서라도 천막을 치고 잘 생각이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주인은 어두운 밤길에 불쑥 나타난 여행자들을 내치지 않았다. 비어 있는 겔 한 채를 내어 주고는 난로에 불도 피워 주고 태양전지에 연결하여 전등불도 밝혀 주었다.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이 겔 하나에 들어앉았다. 사람이 쓰지 않았던지 바닥에는 아무 것도 깔려 있지 않은 흙바닥이었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겔은 천국이었다. 꼼짝없이 바람 부는 바깥에서 얇은 천막을 치고 밤새 떨 줄 알았는데 한숨 돌린 셈이었다.  


▲ 항가이 겔에서의 유숙     © 이시백

먹다 남은 헐헉을 데우고 누룽지를 끓여 요기를 했다. 겔 주인 가족들이 들러 보드카를 나눈 뒤에 여기저기 끼어서 새우잠을 잤다. 남녀도 없고, 머리 다리의 구분도 없이 난민처럼 웅크린 여행자들을 보자니, 참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겔 밖에서 울어대는 바람이 새어드는 한기에 몸을 떨며 침낭 속에 들어가 높고 춥고 쓸쓸한 항가이의 밤은 깊어갔다. 행여 밤중에 누군가 머리를 발로 밟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 속에 빠져든다.

이시백 기자는 소설가로 수동에서 텃밭을 일구며 주경야독하고 있음. 주요 저서로는 장편소설 <사자클럽 잔혹사> <나는 꽃도둑이다> <종을 훔치다>와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누가 말을 죽였을까> <갈보 콩> 등이 있으며, 제1회 권정생 창작기금과 2012 아르코 창작기금, 2014 거창평화인권문학상, 11회 채만식 문학상을 받음.
 

기사입력: 2010/11/03 [00:04]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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