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복 - “땅 일궈서 씨 뿌리면 잘 자라잖아”
[화안인터뷰-판화가 류연복] 자연을 읽는 농부의 마음으로 살며 작업하며
 
박화안
류연복 화가와의 인연은 꽤 된다. 25년 전이다. 그러니까 1985년 당시 배우가 되겠다고 연극판을 기웃거리고 있었을 때 그림쟁이로 통하던 류연복 님을 만나 형이라 부르게 됐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디서 형이라 했고 류연복 님은 언제 나를 후배라 칭하며 눈을 맞춰줬는지 더듬어 낼 수가 없다. 그렇듯 자연스러웠던 셈이다. 또 언제부터 뜸하고 소원해졌는지 그 자연스러움도 기억할 수 없는 세월이 15년 정도 흐른 후, 지난해 11월 한 선배의 판소리공연 기획회의 자리에서 다시 마주하게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견우와 직녀가 만난 것처럼 감격스러워 “야~~ 어 혀혀형~~” “어~~ 으으응” “야하~ 야하~~ 너 이게 얼마만 야하~” 옹알옹알, 웅얼웅얼 왜 이렇게 반가운가 싶었다. ‘아~~ 그렇지, 그렇지’ 내가 연극을 하겠다고 기웃거렸던 동네가 문화운동 판이었다. 꼭 내가 아니어도 됐건만 나는 잠시 연극배우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할 말 많았던 류연복 님도 화가의 길을 에둘러 잡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꿈을 뒤로한 채로 문화단체활동을 한 그 동병상련의 기억을 함께 갖고 있었으니 그날의 만남이 아주 옛날로 돌아가 그리 반가워 옹알이 소란을 떨었던 것이다. 

▲ 류연복

“가만… 그게 그러니까 민예총 때 보고 10년이 됐나요? 와~” “으~~ 어~~ 아니지 10년이 넘었지. 15년 정도 됐을 거야. 야~ 야~” 올 들어 1월 인터뷰를 위해 만나 또 옹알이 감탄사 대화법으로 이야기의 말문을 열었다. 25년 중 한 10년 정도 얼굴 부딪히며 가까이 지내다가 그 뒤 간간히 듣던 소식조차 끊어져 버린 게 15년이나 됐다. 그러했지만 류연복 님도 나도 별 궁금할 것 없이 잘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이것저것 궁금해지는 심사는 무엇일까? 쓸쓸함을 알 것만 같은 나이가 되다보니 심오하다 싶은 예술이 만만하고 친근해져서일까? 주제넘게. 게다가 예술가 딱지를 붙인 사람들의 인생이 궁금하고 그 복합적인 향기가 좋아서 더욱 치근덕댄다. 오지랖 넓게 말이다.
 
1984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어~~ 나 학교 안 나왔어. 아니 학교? 그 학교 나왔나 흐~? 어~ 내가?” 이게 뭔 소린가 했다. “응? 약력을 찾아보니까 홍대 졸업으로 되어 있던데요” 그러자 함께 합석한 선배가 한마디 거든다. “들어가긴 했지만 나오진 못했다는 거겠지” “형 졸업 못했어요?” 맹하게 질문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지금 말이야…” 진짜 말 맺음이 없다. 답답하다. “그러니까 뭐냐고요?” “응~ 얼마 전… 요즈음 홍대사건 있잖아. 부끄럽잖아~. 그게 우리를 슬프게 하잖아”하면서 짠하게 웃는다. 류연복 님은 그렇게 조용히 홍대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 1984년 서울미술공동체 벽화팀 ‘십장생’ 

‘십장생’의 청춘들. 운명이라고 하기엔 사회인식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저항이라고 하기엔 역사를 순리적으로 흐르게 하고픈 강건하면서도 순박한 젊음이었다. 졸업과 함께 벽화팀을 만들어 벽에다 그림을 그린 이야기는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뭐냐면, 당시 80년대 시대상황이 그랬잖아. 대중들하고 쉽게 만날 수 있는 매체들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어. 그때 판화, 벽화, 만화가 사람들과 만나기 좋은 매체였거든. 그때 벽화를 맡게 됐던 거야” “왜 벽화를 맡았어요?” “응? 으~~ 그냥 하다보니까~~흐흐흐” 단순명쾌함보다 더 단순하게 ‘그냥’이라고 했다. 서양화를 전공한 예비 그림쟁이는 벽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시기 류연복 님은 자신의 재능을 이리 저리 돌려가며 써먹는 일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화가로서의 행로를 더디게 만들기도 했지만, 찬란한 ‘아우라’를 품게 하지 않았는가.
 
1986년 담벼락 그림으로 잡혀가다
 
담벼락에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자신의 집 담벼락에. 벽화운동 한다고. ‘십장생’을 그리기 시작했다. “크기는 얼마나 됐어요?” “으~~ 꽤 컸지. 길이가 한 20m 되고 높이는 2m?” “혼자서 그렸어요?” “아니지. 다섯 명 정도였지” “그런데 내 집 담벼락에 그린 그림인데 왜 잡아가는 거야?” 또 엉성하게 물었다. 그러자 느릿느릿 이야기가 이어진다. “시대상황 흐흐흐. 그게 말이야, 우리 동네에 시경에 근무하는 사람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보았다가 경찰에 제보를 한 거야. 처음엔 나만 잡혀갔지. 경찰들이 벽화를 지웠대” 수성페인트로 벽을 덮었다. “물을 뿌려서 복원했는데 다시 지운거야”  경찰이 확실하게 유성페인트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다섯 명 몽땅 연행되는 수순으로 갔다. 물론 나중에 무혐의 처리로 사건은 종결됐지만 서울미술공동체는 예의주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경찰의 무도한 눈 쏠림은 상식과 예측을 불허하고 있었다. 이렇게 류연복 님과 그림쟁이들이 벌인 일련의 행위와 사건들을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 민중미술운동이라고. 그것은 시대정신이었다.


1987년 걸개와 판화운동
 
벽이 없어졌다. 그러나 ‘십장생’ 팀은 다시 벽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 뒤 어떻게 작업을 하셨어요?” “벽화운동이 걸개운동으로 간 거지. 자연스럽게” 참 무언가를 예견한 듯하다. 87년 6월항쟁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 봇물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고 여기저기서 분노하는 시민들과 젊은 청춘들은 쓰러지고 또 거리로 나왔으며 거기에 빠짐없이 걸개그림이 등장했다. 벽이 이동하면서 걸개가 됐고, 심하게 곪아버린 환부는 판화로 파헤쳐졌다. 적나라하고 격렬한 시대였다.
 
단체 일을 하며 판화를 익히다
 
“전공은 서양화인데 왜 판화예요?” “으응~ 그거 사실 처음에 난 벽화를 했잖아” 흐흐흐 웃는다. “그러니까 뭐냐면, 판화를 할 생각은 없었어. 단체 일을 하다보니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더라고”

그랬다. 류연복 님은 서울미술공동체 말고도 민족미술협의회에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 주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시기 단체 상황은 많은 실무와 회의, 연대활동, 조직관리나 운영을 주로 몇몇 사람이 하면서 바쁘게 돌아가던 시기였다. “그래도 자투리 시간을 내서 할 수 있는 것이 판화더라고. 그리고 그림이란 게 가슴도 중요하지만 손의 기능도 아주 중요하지. 손의 감각을 잃으면 안 되니까” 손재주 없고 그림 재능 전혀 없는 나로서는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다가 어떻게 칼 모양의 끌로 작업을 할까 무척이나 부러운 지점이다. 어찌됐든 80년대는 류연복 님을 판화가로 이끌었고, 판화는 삶의 화두가 됐다. 
 
1989년 ‘갈아엎는 땅’
 
80년대 끝이다. 뭔가 이대로는 안 된다,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한다는 당위감과 책무감이 사람들의 호흡을 타고 넓은 진동이 되던 시기였다. “89년에 3인 공동전시를 하셨죠?” “으~~~ 했지 했어” “왜 하셨어요?” 불쑥 물었다. 질문이 웃겼던 모양이다. “으 흐흐흐 그러니까… 80년대를 겪어보니까 농사로 치면 경작이 필요하다고 봤지” 참 세다 발상이. 갈아엎겠다는 것이다. “왜 그 세 명이었어요?” 질문인가? 나원참! “민미협 사무국장 출신들이라서 크허허허~” 질문 수준에 딱 맞는 대답이다. 민족미술협의회 사무국장 1대 홍선웅 님, 2대 류연복 님, 3대 김준권 님이었는데 이 세 명은 당시 민미협의 자랑스러운 청년들이었던 것이다. “우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둘이 같이 아주 크게 웃었다. 조금 근사한 의미를 기대한 나는 허망했다. 이렇게 어떤 일에 의미를 골 싸매고 찾지 않고 직관과 감각으로 ‘그냥’ 한다. 그러면 그것이 의미가 되고 꿈이 되고 이상이 되는 것이다. 이 모양새가 바로 류연복 님이 시대를 읽는 방식이면서 시대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판화연작
 
시대상황은 계속 끓고 있었다. 사회는 민주화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진통에 진통을 거듭했고 거리는 최루탄 냄새로 눈물, 콧물 원 없이 흘렸다. 정치·사회·문화운동으로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이 변화되고 있었다. 류연복 님은 시대의 변화를 길게 봤다. 그리고 판화로 세상을 바꿔보고자, 아니 바뀌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을 갈지? 쟁기질, 경작. 그담엔 싹을 틔워야지? 씨를 뿌려서” ‘아! 그렇구나! 자연을 읽는 농부의 마음으로 돌아갔구나 생각했다. “땅을 잘 일궈서 씨를 뿌리면 그냥 잘 자라잖아. 생명이란 게 말이야” 슬렁슬렁 힘들이지 않고 이야기 한다. 자신의 판화를 순환하는 생명의 화두와 연결하기 시작했다.
 
1989년 「갈아엎는 땅」, 1993년 「새싹틔우기」, 1995년 「스스로 그렇게」, 2000년 「생명」, 2004년 「딛고선 땅 1」, 2007년 「딛고선 땅 2 - 금강산과 독도를 거닐다」, 2010년 「딛고선 땅3 - 남한산성」까지. 아, 남한산성은 조금 다르다.
 
1993년 안성으로의 이주
 
삶과 작업의 터전을 옮겼다. “선배 누나로부터 물려받았어. 땅을 말이야. 안성에서도 아주 산골이라 땅값이 허름했으니까” 안성으로 이주한 이유를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마침’, ‘우연히’라고 했다. “서울에서 더 해야 할 작업이 많지 않더라고. 지역에서 일을 해야겠다 생각한 것도 있고”

맞다. 80년대를 뜨겁게 살며 세상을 향해 소리치던 거칠고 뭉툭하고 뚝심 있던 민중미술의 시대적 소임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간이 최후로 돌아가 안기는 자연을 그리고,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삶을 칼끝으로 새기려 한 것 같다. “거기로 이사 가기 전에 꿈을 꿨는데~~” “무슨 꿈? 귀신 꿈이요?” 나는 귀신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거기 산골이었으니까 귀신 나타났겠다. 그죠?” “흐흐흐 엥~ 아녀~~ 거북이 꿈을 꿨어” 꼭 자기 닮은 꿈이다. “선배 누나도 꿈을 꿨대. 거 뭐냐~~ 큰 풍로와 작은 풍로를 가지고 있더래, 그래서 나한테 작은 풍로를 줬대나 뭐래나~~ 으 흐허허” 선배 누나와 류연복 님이 합동으로 꾼 꿈. 거북이와 풍로. 말해 무엇 하나, 완전 길몽이다.
 
그렇게 완전 길몽을 꾸고 안성으로 이주해 류연복 님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사계절의 자연과 생명을 나무에 담아 순환시키고, 풍로가 지펴낸 아궁이처럼 뜨끈뜨끈한 가슴으로 자신의 그림을 나누며 지역 일을 하고 있다. ‘류연복스럽게’ 세상을 바꾸고 진화시킨다.
 
판화의 재료, 도구의 미학과 철학 
 
서울에서 판화의 재료는 고무였다. “질감의 차이를 말씀해주세요” “글쎄~~ 밥과 패스트푸드의 차이라고 보는데” 참 적절한 표현이다. 금방 알아듣겠다. 근데 고무판화가 더 세밀한 느낌을 낼 수 있지 않나 싶었다. “고무판화는 인쇄의 느낌이 많아” 그렇다. 세밀한 인쇄의 느낌이다. “그런데 그렇잖아. 숨결이 느껴지지 않아. 고무가 화학의 형태에서 나온 거라서…” 고무판화에서 죽은 물질을 진하게 느끼고. 그렇다면 나무판화로 재료를 바꾼 속내를 들어보기로 했다.
 
“아무(我無)야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생명을 나누고 품어.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 누군가를 위해 베푸는 넓이와 깊이에 감명을 받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품성을 배우지” 그러고 보니 「둥글어진다는 것은 낮아짐입니다」라는 판화 산문집의 제목이 떠올랐다. 자신을 낮춰서 함께 공존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터득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말이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졌다. ‘으~~~’로 시작해 대답이 명확히 맺어지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세상을 관조하면서 다양한 상황을 포용하는 류연복 님의 눈빛을 내 시선으로 가져왔고, 말을 마음에 새겼다.
 
“판화의 작업과정을 이야기 해주실래요?” “먼저 밑그림을 그리지. 스케치. 어~~ 그 담에 칼로 파는 거지 뭐. 또 그 담엔 찍어내지~~~ 먹을 칠하고, 색깔을 입히고 여러 번 작업을 해야 된다니까~~ 흐흐흐흐” 그러고 보니 이런 과정을 거치려면 몇 가지 도구가 필요할 게 아닌가? 연필, 붓, 칼, 펜, 뭐 이런 도구들이 생각났다. “칼은 참 직접적이야. 단선이지. 단번에 그어버리는 느낌~~~” 눈빛이 칼처럼 단호해진다. “붓은 자체의 길이가 있잖아. 떨림을 동반하지~~~ 으… 그런 다음 붓끝을 한순간에 놀려야 해. 그 과정을 난 사유라고 생각해~~ 하하하” 류연복 님의 웃음이 시간과 공간에서 동시에 울린다. 미묘해 복잡한 웃음. “판화의 맛, 이 맛 때문에 판화를 좋아하는데, 으~” 또 생각한다. 머릿속에 시간과 공간이 자리 잡나 보다.
 
“판화는 곡선으로 노닐다가 직선으로 베어지잖아” 여기서 틈과 사이에 있는 여유와 여백을 발견하고, “나무는 식물이잖아 본래~, 죽고 살고” 여기서 순환을 본다.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건만 류연복 방식으로 이야길 하니 그 체화된 깊이에 마음이 공명된다. 판화는 확실히 그의 삶의 화두다.
 
2010년 병풍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어떤 귀신이 쓰여서 이 작업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그거? 임진택 귀신이 씌었지~ 크 하하하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장 빠르게 대답했다. 귀신 이야기 좀 들을까 하고 기대했건만 허망했다. 옆에 앉아 있던 광대 임진택 님이 크게 웃으며 한마디 거든다. “그려? 이서의 귀신도 아니고 홍타이의 귀신도 아닌 내가 씌었단 말이지? 흐흐흐. 좋은 소리야 허허허” 광대귀신이 쓰였나 보다. “80년대 작업방식이 좋았지” “거~ 몇 년도냐? 을축년 미술대동잔치~~ 노래공연, 악기공연하고 같이 했어. 오프닝 세레모니로 크 흐흐흐흐흐” 이번 목판화는 창작판소리 ‘남한산성’의 무대설치물인 병풍과 걸개그림으로 제작되고 있다.
 
이렇게 공연의 배경이 되어 완성시키는 이 방식이 좋다고 했다. “현장성, 연극성과의 결합이잖아~~ 좋잖아~~” 오래도록 ‘남한산성’ 판화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것을 일일이 손으로? 아니 칼로 팠단 말인가? 펜으로 그린 게 아니고 와~~~ 그냥 입이 벌어졌다. 시점 잡는데 한 달 걸렸고 스케치 한 달 하고, 파는데 한 달 걸렸다고 한다. “시점은? 계절을 잡고. 겨울이니까 팍팍하고, 춥고 또 곤궁하고 뭐 그렇잖아” 병자호란을 떠올리게 되는 남한산성. 그 절규와 아우성과 의연함을 표현할라치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류연복 님은 19세기로 돌아가 그 시대상황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판소리와도 만나야 했고. 이제 5월이 오면 남한산성 행궁에 류연복 님의 ‘남한산성’ 걸개그림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창작판소리가 공연될 것이다.



“작업? 대충대충 쉬엄쉬엄 할거야”
 
“왜요?” “응? 그거, 쓰레기 양산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흐흐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 조금만 하세요. 쓰레기 만들지 말고~ 호호” 아주 사적인 친밀감으로 그냥 대꾸했다. “건강은 어떠세요?” “게 말이야? 몸도 그래, 작업을 조금만 하라는 신호를 보내” 구부리고 앉아 나무에 칼집을 내고 있으니 허리도 아플 것이다. 무엇 보다고 눈이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어떤 미술 평론가는 그의 산수 목판화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겨워하지 않고 자세하게, 지겹도록 자세하게’ 탄성을 부른다. 그만큼 눈은 혹사당한다. 손도 무척 혹사당하겠지. “목판화는 나무를 죽여야 얻어지잖아” 내가 생각하는 사이 말을 이어간다.
 
“판화 한 장 한 장 찍는 거 이거 죽음의 부산물로 볼 수 있고, 나무를 죽여 얻는 미적 완성에 회의가 들어. 그런 만큼 무엇을 주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맞는 말이다. 판화가 류연복은 그렇게 회의하며 사유한다. “흠흠흠…” 생각이 담긴 밭은기침을 뱉는다. 시선을 안으로 잡아당기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 자리에서 못한 말, ‘형과 동시대를  넘어왔고 함께 살고 있어서 참 뿌듯하네요’라는 말을 건네 드리고 싶다.
 
간결하게 정리하지 못해 글이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미국과 독일, 아랍으로 갔던 류연복의 판화 이야기를  생략한다. 여기저기 특별한 시선이 포착되는 이야기인데 참 아쉽다. 다음 기회에 올리고자 한다. 마침 류연복 님의 전시가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다. 더 가까이 만나시길…
 
류연복 목판화전 - 산
2011. 2. 7. ~ 2. 22
인사동 북스 갤러리
blog.naver.com/vooksmania



기사입력: 2011/02/11 [16:37]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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