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덕에 농촌이 잘살게 되었다?
 
이시백
불당골이라는 시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새벽에 누군가 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부역을 나오라고 소리쳤다. 부역이 뭐냐는 말에 아주머니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알고 보니, 부역이라는 것이 추석을 앞두고 마을 길가의 풀을 베는 공동작업이었다. 그 뒤로도 부역은 몇 차례 더 있었고, 사정이 있어 빠지는 바람에 벌금으로 5만원을 내기도 했다.

마을 일을 공동으로 하는 두레야 오래된 미풍양속이라고 배웠지만, 막상 세금을 꼬박꼬박 받아먹는 관청은 뒤로 물러나 있고, 삯은커녕 벌금만 있는 ‘부역’에 새벽부터 불려나가는 게 마뜩잖았다. 문제는 그런 불만을 가진 이들이 별반 없다는 것이다. 말 많으면 공산당, 불평하면 빨갱이라는 소리나 듣기 십상인 촌에서 별쭝맞게 따지고 나설 입장도 못 되었다.

근면·자조·협동을 모토로 진행된 ‘새마을운동’. 제2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후진국·개발도상국에 모델을 수출할 만큼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성공모델일까. 사진은 지난해 12월, 행정자치부와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진행한 ‘아프리카 우간다와 탄자니아 새마을운동시범사업 성과관리를 위한 현장 모니터링’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버지 박정희 이어 제2 새마을운동
부역에 나가면서 알게 된 일이 아직도 ‘새마을 지도자’가 생존해 있으며, 그런 부역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왕년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새마을운동에 삽 들고 나선 사람들에게는, 임은 갔어도 새마을운동은 살아남아 있었다.

그 새마을운동이 아버지 박정희에 이어 영애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러 제2의 대약진을 맞이할 태세라 한다. 그 좋은 운동을 이 나라에서만 지니고 있기 안타까워 미얀마나 라오스, 멀리 아프리카의 르완다까지 전파하기에 힘쓴다 하니 가히 세계적인 공업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해 인류사에 길이 남길 위업이 아닐 수 없겠다.

얼마 전에는 세네갈에서 주민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본받아 보급하기로 했단다. 다른 건 밀어두고, 주민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한 새마을운동이라는 대목에서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1971년 근면·자조·협동의 거룩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3만3267개 마을의 주민들에게 정부가 시멘트 335부대씩을 지원하여 시작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 과연 주민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것일까.

아는 시인이 강원도 산골짝에서도 한참 들어간 곳에 집을 지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농가의 지붕도 슬레이트로 덮여 있었다. 차도 들어서지 못하는 그 후미진 농가가 어떻게 지붕 개량사업에 참여했을까. 장날마다 산을 몇 개나 넘어 슬레이트를 지게로 져 날랐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은 두메의 초가삼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면사무소 벽마다 통계표를 매달아놓고, 새벽부터 면 서기들이 자전거를 몰고 달려와 이장을 들볶는 통에 6·25 때도 전쟁이 났는지를 몰랐다는 두메산골의 삶도 온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농민들의 자발성과 능동성, 자조 정신이 무엇보다 강조되었지만, 그러한 표방과는 달리 국가의 정책은 효율성과 가시적인 성과를 중심으로 강압적으로 시행된 측면이 있다. 농민들은 잘살기 위해 참여했지만, 그들의 잘사는 내용과 방향을 결정해 준 것은 국가로, 농민이 운동의 자율적 주체라고 보기 힘든 운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실려 있는 말이다.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의 지원금으로 구로 등지에 공단을 지어 농촌의 젊은이들을 헐값 노동력으로 끌어낸 일이다.

지금의 농촌 공동화는 그로부터 배태된 셈이다. 도시 발전을 위해 곡가를 붙들어 매 농촌 살림이 어려워지자,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그러자 똥 싼 놈이 눈 부라린다는 격으로, 농촌이 가난한 건 겨울에 나이롱뽕만 치고 게으른 탓이라고 버럭 화를 낸 게 누굴까. 마을마다 확성기 하나 매달아주고, 새벽부터 자신이 작곡한 ‘새벽종이 울렸네’란 노래로 단잠을 깨워 품삯도 안 주는 부역으로 촌사람들의 허리를 휘게 한 것이 누구일까.

빚까지 내서 할 만한 운동이었는가
이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 농민을 위해 한 일이라곤, 모내기 때 ‘대한뉘우스’ 카메라 앞에서 발목 걷고 논에 들어가 모를 몇 포기 심고선 촌로와 막걸리를 마시고, 저녁이면 안가에서 여대생 끼고 시바스리갈을 마신 것이요, 이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 농촌의 발전을 위해 기껏 했다는 게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꾼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이 보릿고개를 면하고 잘살게 된 것이 새마을운동 덕이라는 말이 사실일까. 긴말 말고 통계를 들여다보자. 정길환의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란 책에 따르면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 정책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이 강행됐던 시절. 저곡가로 농촌은 몰락해 갔고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중화학 우선 정책은 결국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려놓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새마을운동 또한 농민들의 큰 짐이 됐다. 환경 개선 등 외형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새마을운동 10년간 농가 부채는 21배나 늘었다.”

고향 집 앞에는 개울이 있었다. 봄이면 복사꽃이 떠내려오고, 여름밤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멱을 감던 개울이었다. 부지깽이까지 일손을 거든다는 농번기에도 질통을 짊어지고 품삯도 없는 일에 동원된 새마을운동 덕에 개울은 시멘트 도랑이 되었다. 깔끔해 보였는진 몰라도 시멘트 도랑은 장마만 걷히면 이내 말라붙었다. 빨랫돌 밑에 엎드려 있던 구구리도, 은화처럼 비늘을 번쩍이던 피라미도, 여름밤에 아련히 날아다니던 반딧불이도 사라지고, 지금은 오물만 질금거리는 하수구가 되어 버렸다.

유일하고, 가시적인 성과라 일컬어지는 초가 지붕개량은 급조한 대체물인 슬레이트가 1급 발암물질로 밝혀지면서, 이제는 걷어내려고 해도 골칫덩이가 되었다. 시멘트로 바른 개울은 걷어내어 생태하천으로 만드느라 턱없는 돈이 들어가고, 곧게 포장한 도로는 산촌마을 만드느라 벗겨내어 구부리기 바쁘다.

새마을운동이 아니면 지금의 농촌이 있었겠느냐는 물음에 되묻는다. 그것은 새마을운동 덕도 아니오, 박정희 대통령의 탁월한 능력보다 범국민, 범국가라는 말에 억눌려 끌려나오고, 불평 한 마디 찍소리도 못한 민초들의 삯도 없는 땀과 눈물의 결과일 뿐이다.

 
대표적인 농촌 현실을 다룬 이문구의 소설을 되읽어 본다.
“그건 워디까장이나 긔네 사정여, 그 새마을운동이 한참일 적에 내가 땅을 얼마나 뺏겼는지는 한동네서 살었던 자네가 더 잘알껴…. 마을 안길 넓힌다구 한 구텡이 비여갔지, 공동 축사 맹근다구 한 모서리 도려갔지, 마을회관 앞마당 닦으면서 멀쩡한 밭 오려갔지, 고샅길 포장헐 때 자가웃씩이나 먹어들었지…… 마을 꽃동산 가꾸기 헐 때 그랬지, 사에치 표석이라나 지랄이라나 해 박으면서 그랬지, 올림픽 때 호돌이상인지 얼룩괭이상인지 세울 때 세멘 공구리 비벼서 논 한 배미 절딴내 놨지…. 그때는 심으루 누르던 무단시대라 찍 소리두 못 허구 당해버렸지만 이제는 어림두 없으니, 암.”

<이 기사는 주간경향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이시백 기자는 소설가로 수동에서 텃밭을 일구며 주경야독하고 있음. 주요 저서로는 장편소설 <사자클럽 잔혹사> <나는 꽃도둑이다> <종을 훔치다>와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누가 말을 죽였을까> <갈보 콩> 등이 있으며, 제1회 권정생 창작기금과 2012 아르코 창작기금, 2014 거창평화인권문학상, 11회 채만식 문학상을 받음.
 

기사입력: 2015/04/17 [00:53]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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