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은 어떤 것일까
 
이시백

박근혜 대통령이 자리에 오른 지 1년이 되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의 김재원 대변인은 “박근혜 후보가 정치를 시작한 게 아버지 명예회복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변인의 발언은 ‘박 후보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일을 사과하더라도 실제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겨 적잖은 논란에 휩싸인다. 당사자인 대변인이 발언을 부인하고, 하루 만에 전격 사퇴하는 바람에 유야무야되었다.

진실은 무엇일까. 정혜신이 2005년에 펴낸 ‘사람 VS 사람’이라는 흥미로운 책에 따르면, 박근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나서 “아버지께서 평생을 바쳐 이루어놓은 나라의 경제가 지금 병들어 있으니 이것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최대의 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환위기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경은 더욱 절박하다. “저는 외환위기 사태를 당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망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가만 있어도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은 이 나라를 ‘누가, 어떻게’ 세웠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법무부, 안전행정부, 식품의약품안전처, 원자력안전위원회 업무보고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대선 공약들 잘 지켜지고 있나

앞서 소개한 정혜신의 책에는 좀 더 학술적으로 분석한 내용이 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부성 콤플렉스를 가진 여성을 ‘영원한 소녀’(pueiia aeterna)라고 부른다. 그들은 성장 후에도 여전히 현실적 부모와 신화적 부모를 분리하지 못하는, 부모 문제에 관한 한 유아적 심리상태에 머물러 있다.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신화적 부성원형으로서의 박정희’를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박근혜는 아버지를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국가와 세계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해준 자상한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자상한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인 아버지 박정희에게서 어떤 정치적 교훈을 얻었을까. 누가 뭐래도 박근혜 대통령의 이미지는 ‘원칙주의자’에 있다. 과연 그녀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원칙’은 어떤 것일까,

대통령이 된 후 1년 동안 그녀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국민 앞에서 약속한 공약들은 어떻게 지켜지고 있을까. ‘경제민주화’라는 매력적인 말로 포장되었던 부당특약금지의 하도급법, 은행에 대한 산업자본 지분 소유 규제의 은행법,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의 공정거래법 등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들에 대한 노령연금과 4대 중증질환 국가보장 등을 비롯한 복지정책들은 뒤로 물러섰으며,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비롯한 정치적 개혁안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민과의 소통이니 대통합이니 하는 미사여구는 양보한다 해도, 당혹스러운 점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은 이 원칙주의자의 ‘당당함’이다. 지키지 못한 원칙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나 언급도 없이 오로지 근엄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3 전국우수시장 박람회장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전시된 부친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있다. | 청와대 사진기자단


18년 동안 집권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토론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오일 쇼크가 닥쳐와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 에너지 위기를 대비하지 못하고 미처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보다는, 국민들의 무절제한 에너지 낭비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네온사인 불을 끄게 하고, 자동차 이부제를 하며 야단만 맞은 기억이 있다.

양보 없는 고집, 근엄한 군림이 원칙?



사과 대신에 야단을 치는 지도자. 그런 아버지 박정희를 나침반으로 삼은 정치적 후계자에게 원칙이란 어떤 것일까. 혹시 내가 한 말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이들과는 어떤 타협이나 양보도 없는 ‘고집’이거나, 근엄한 ‘군림’은 아닐까.

박근혜 정부의 1년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 흔들림 없는 원칙이다. 흔들림 없는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수많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볼모로 한 외교와 안보의 문제는 대담한 배짱보다는 신중하며 유연한 판단에 있다. 

민족 파탄의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인 전쟁에 대해 무모한 만용과 담력을 내세울 자격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일시적으로는 상대를 강박하여 어떤 이득을 얻어낼 수는 있겠지만, 전쟁이 아닌 평화통일을 원하는 지도자라면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대화를 통한 공생에 힘써야 할 것이다.

원칙이 들어섰어야 할 자리에는 무엇들로 채워졌을까.
초원복집 사건의 당사자인 김기춘 비서실장의 복귀, 국정원을 앞세운 사찰과 공작정치의 징후들. 채동욱 검찰총장의 찍어내기, 그리고 범람하는 종북몰이에 편승한 과도한 공안정국의 분위기, 당장 포성이 들려올 듯 조마조마한 남북의 대결 분위기 - 이러한 징후들은 유감스럽게도 70년대 유신의 냄새를 풍긴다.

이제 정치인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한 나라의 미래를 짊어진 대통령이다.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공과를 냉철히 판단하며, 비판을 통해 아버지를 뛰어넘을 때에야 비로소 성숙한 정치인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 편승하여 그것을 정치적인 지지기반으로 삼아 과거로 퇴행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술수는 되겠지만 양식 있는 정치의 원칙은 아닐 것이다. 지켜지지 않는 원칙을 원칙으로 내거는 것이야말로 상식의 비상식화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김정란 교수가 날카롭게 지적한 지점들이 애정 어린 조언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내가 박근혜를 문제삼는 건 ) 그녀의 개인적 자질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인 상징 지분의 위험성 때문이다. 그녀는 철저하게 박정희 신화에 편승했으며, 박정희에 대한 어떤 비판에도 진정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 내가 박근혜가 누리고 있는 정치적 후광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모든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그 신화적 요소 때문이다. 
(……) 박근혜는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도 없이, 비이성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신화적 아우라에 감싸인 채 유권자들에게 다가간다. 유권자들은 박근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신화의 살아 있는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는 박근혜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아니다. 박근혜는 언제나 박근혜의 타자이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도 실렸습니다]

이시백 기자는 소설가로 수동에서 텃밭을 일구며 주경야독하고 있음. 주요 저서로는 장편소설 <사자클럽 잔혹사> <나는 꽃도둑이다> <종을 훔치다>와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누가 말을 죽였을까> <갈보 콩> 등이 있으며, 제1회 권정생 창작기금과 2012 아르코 창작기금, 2014 거창평화인권문학상, 11회 채만식 문학상을 받음.
 
기사입력: 2014/03/12 [00:44]  최종편집: ⓒ 남양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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